비 오는 날
어중간한 오전 시간, 새달의 월간지를 펴 들었습니다.
소나기 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득 수십 년 전 이런 날 오전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일 같으면 무슨 수가 나도 났을 터인데 책을 읽는 일로써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으므로 난감하고 한심하지만 어쩌면 그것 역시 다행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세월 속 비 내리는 날들이 떠올라 책읽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 기억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빈 비료포대를 뒤집어쓰고 학교에 갔습니다. 우산을 쓴 아이가 보였지만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말하는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담임 선생이 우리들 중 몇 명을 호명해서 자신이 맞을 때 쓸 매를 만들어오라고 명령한 날도 오늘처럼 소나기가 퍼부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을 뿐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두고두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학교 주변에는 아카시아 나무만 있었고, 우리는 칼도 없이 손만으로 그 나무를 꺾어서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맞아야 할 매를 다듬었습니다.
그렇게 자라나서는 비가 와도 가야 할 곳,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을 가던 날도 있었고, 더러 비가 와도 가고 싶은 곳을 가던 날도 있었고, 서귀포에서처럼 곧 떠나야 할 시간을 기다리며 창 너머로 소리없이 비가 내리는 뒤뜰을 내다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은 반드시 가야 할 곳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게 되어 이렇게 창문 너머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빗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날들에 나는 창문 너머로 비 오는 모습을 내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쓴다고 해봐야 그런 날들을 그림처럼 그려낼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들이 멎으면 다시 저 월간지를 얼마쯤 읽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