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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어린애들이 영어를 왜? (2018.2.19)

by 답설재 2018. 2. 20.

 

 

 

프랑스 소설 "도살장 사람들"(조엘 에글로프)에 나오는 마을은 쓰레기하치장, 폐수처리장, 게다가 비행장까지 인접한 공장지대로 낮에도 가로등이 꺼지지 않는 암울한 곳이다. 서풍은 썩은 달걀 냄새를 실어오고 동풍이 불면 유황 냄새에 목이 꽉 메고 북풍이 불면 시커먼 연기가 날아든다.


어린애들은 창백하고 어른들은 제대로 늙을 수조차 없는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학생들은 무언가를 배우려고 소, 돼지를 밤낮없이 잡아대는 그 마을 도살장까지 찾는다.


요일별로 모든 연령대의 방문객을 받아주는 그 도살장 현장학습을, 유치원 선생님은 격주로 금요일에 실시한다. "음메" 하고 우는 암소, "메" 하고 우는 양을 살펴보고 소시지는 무얼 넣어서 만드는지 알아본다. 그 현장학습은 몇 달 동안, 그러니까 아이들이 싫증을 낼 때까지 계속된다.

 

'머리가 큰 상급학교 아이들'은 주로 기술적인 것에 흥미를 느껴서 자동장치들 즉 전기·수압·공기압력으로 움직이는 기계들을 궁금해한다. 조만간 취업전선에 나설 학생들의 학습은 더 깊다. 그들은 긴 질문 목록을 가지고 나타나 구체적인 것들을 파고든다. 마취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피는 어떻게 뽑아내고 내장과 힘줄은 어떻게 제거하는지, 열탕식 털뽑기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묻고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한다. 현실적인 것도 조사한다. 한 시간에 몇 마리나 처리하는지, 하루에 몇 시간이나 근무하는지, 이것저것 합하면 얼마나 버는지….


그 도살장 일꾼 하나가 유치원 선생님을 짝사랑한 애틋한 사연이 인상적이던 "도살장 사람들"이 영어 조기 교육 때문에 생각나는 소설이 되었다. 영어 교육 논란이 어린이집·유치원에 이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이어지는 걸 보며 소설 속 현장학습이 떠오른 것이다.

 

지난해 12월 교육부에서 '유아교육 혁신방안'을 발표하면서 유치원․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 수업 금지 방침을 밝힌 것이 발단이었다.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유치원·어린이집에서 영어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영어 유치원이나 학원에 큰돈을 내고 배울 형편이 안 될 경우 영어를 배울 수가 없으므로 '돈 없으면 영어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의견수렴 후 새로 결정하겠다고 하자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2014)으로 올해부터 시행이 예정된 초등학교 1, 2학년 방과 후 영어 교육 금지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일찍 가르칠수록 잘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찍 외국어를 접하면 인지능력과 판단력이 모국어만 배운 아이보다 더 발달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그 기간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영어 대신 다른 걸 배운 아이들과 비교해봐야 합리적이다. 무엇이든 일찍 가르치면 다른 것보다 그걸 더 잘할 건 이야기하나마나다.


영어를 가르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다만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영어를 가르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건 저 도살장 견학을 '언제 실시하느냐' 하는 논란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소설 속 도살장 동네 사람들이 들으면 의아해할 논란에 빠진 것이다. 아이들은 관심도 없는 걸 가지고 다투는 꼴이다. 우리가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영어 조기 교육이 (엉뚱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린애들의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길러주는 것인지, 적절한 방법인지, 그걸 따져야 한다.

 

"영어를 가르치자, 말자"가 아니라 놀이, 활동을 이야기해야 한다. 영어 조기 교육은 영어 한 가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놀이, 활동의 소재에 영어를 포함시키는 건 상상력, 창의력을 기르는 것이고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본격적인 영어 학습을 잘 도입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육이다.

 

아이들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읽으며 황당하고 괴이쩍은 스토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상상력, 창의력으로 꿈을 읽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