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 "도살장 사람들"(조엘 에글로프)에 나오는 마을은 쓰레기하치장, 폐수처리장, 게다가 비행장까지 인접한 공장지대로 낮에도 가로등이 꺼지지 않는 암울한 곳이다. 서풍은 썩은 달걀 냄새를 실어오고 동풍이 불면 유황 냄새에 목이 꽉 메고 북풍이 불면 시커먼 연기가 날아든다.
어린애들은 창백하고 어른들은 제대로 늙을 수조차 없는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학생들은 무언가를 배우려고 소, 돼지를 밤낮없이 잡아대는 그 마을 도살장까지 찾는다.
요일별로 모든 연령대의 방문객을 받아주는 그 도살장 현장학습을, 유치원 선생님은 격주로 금요일에 실시한다. "음메" 하고 우는 암소, "메" 하고 우는 양을 살펴보고 소시지는 무얼 넣어서 만드는지 알아본다. 그 현장학습은 몇 달 동안, 그러니까 아이들이 싫증을 낼 때까지 계속된다.
'머리가 큰 상급학교 아이들'은 주로 기술적인 것에 흥미를 느껴서 자동장치들 즉 전기·수압·공기압력으로 움직이는 기계들을 궁금해한다. 조만간 취업전선에 나설 학생들의 학습은 더 깊다. 그들은 긴 질문 목록을 가지고 나타나 구체적인 것들을 파고든다. 마취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피는 어떻게 뽑아내고 내장과 힘줄은 어떻게 제거하는지, 열탕식 털뽑기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묻고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한다. 현실적인 것도 조사한다. 한 시간에 몇 마리나 처리하는지, 하루에 몇 시간이나 근무하는지, 이것저것 합하면 얼마나 버는지….
그 도살장 일꾼 하나가 유치원 선생님을 짝사랑한 애틋한 사연이 인상적이던 "도살장 사람들"이 영어 조기 교육 때문에 생각나는 소설이 되었다. 영어 교육 논란이 어린이집·유치원에 이어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이어지는 걸 보며 소설 속 현장학습이 떠오른 것이다.
지난해 12월 교육부에서 '유아교육 혁신방안'을 발표하면서 유치원․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 수업 금지 방침을 밝힌 것이 발단이었다.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유치원·어린이집에서 영어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영어 유치원이나 학원에 큰돈을 내고 배울 형편이 안 될 경우 영어를 배울 수가 없으므로 '돈 없으면 영어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라는 비판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의견수렴 후 새로 결정하겠다고 하자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2014)으로 올해부터 시행이 예정된 초등학교 1, 2학년 방과 후 영어 교육 금지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일찍 가르칠수록 잘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찍 외국어를 접하면 인지능력과 판단력이 모국어만 배운 아이보다 더 발달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그 기간에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영어 대신 다른 걸 배운 아이들과 비교해봐야 합리적이다. 무엇이든 일찍 가르치면 다른 것보다 그걸 더 잘할 건 이야기하나마나다.
영어를 가르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다만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영어를 가르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건 저 도살장 견학을 '언제 실시하느냐' 하는 논란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소설 속 도살장 동네 사람들이 들으면 의아해할 논란에 빠진 것이다. 아이들은 관심도 없는 걸 가지고 다투는 꼴이다. 우리가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영어 조기 교육이 (엉뚱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어린애들의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길러주는 것인지, 적절한 방법인지, 그걸 따져야 한다.
"영어를 가르치자, 말자"가 아니라 놀이, 활동을 이야기해야 한다. 영어 조기 교육은 영어 한 가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지만 놀이, 활동의 소재에 영어를 포함시키는 건 상상력, 창의력을 기르는 것이고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본격적인 영어 학습을 잘 도입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육이다.
아이들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읽으며 황당하고 괴이쩍은 스토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상상력, 창의력으로 꿈을 읽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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