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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기이한 길에서 보내는 편지

by 답설재 2017. 10. 19.

 

2017.8.10. 제주

 

                                                                                                                                             

걸핏하면 지난날이 떠올라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 지난날이란 것이 교과서라는 것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교과서라니 원…….

 

그렇긴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구나 교과서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을 처음 만나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어이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겠지만 그게 '정말로' 진심이었으니 이건, 그러니까 좀 거창하게 표현하면 이렇게 걸어가는 이 길은, 제게는 필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교과서에 관한 일을 하는 분들이라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저 문선공부터 존경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문선공! 그렇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받았음직한 시호(諡號) '文善公' 혹은 '文宣公' 들이 아니라 여기저기 몇 개의 알전구 아래 잘 들여다봐야, 일쑤 한심한, 잘난 체 휘갈겨 쓴 육필 원고의 그 글자들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을 그 어둑어둑한 공무국의 '文選工' 말입니다.

 

  저는 양재동에 있던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드나들기 전, 대방동의 국정교과서주식회사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찍이 그 교사 시절에 이미 교과서가 중요하다는 걸 인식한 대단한 인물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교과서 원고께나 쓴다고 문교부 편수관께서 걸핏하면 저 먼 곳의 저를 불러올려서 초판(初版), 재판(再版)을 위한 일들을 맡기셨는데 방학이 되면 아예 신촌 어디쯤에서 하숙을 하며 그 일을 했습니다.

 

  교과서가 중요하긴 하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이래저래 교과서로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겠지요. 교사들이야 꼭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교과서가 없는 나라라면 어떻게 교과서가 중요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나라 교사들도 교과서를 존중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 이렇게 얘기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차라리 교과서가 없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잘 가르치겠다' 싶은 교사들이 우리나라라고 없진 않을 것입니다. "김 선생이 바로 그런 교사였다는 건가요?" 하고 물으시면 쑥스럽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제에 교과서 없이 허구한 날 무슨 수로 그 아이들을 다루었겠습니까? 저는 그냥 교과서라면 무조건 존중하는 그런 교사였습니다.^^ 다른 교사와 마주하고 "내가 옳다! 당신이 그르다!" 다투다가도(우리는 아는 게 적어서였던지 무수히 다투며 지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데도 그래요?" 하면 저는 당장 입을 닫았습니다. '분하지만 교과서에 나온다는대야 어쩔 수 없지.'

 

  분명한 사실은, 저는 그런 교사였기 때문에 교과서 회사 직원들이라면 무조건 존중·존경하였고 봉급을 얼마나 받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실례일 것 같아서 지금도 그런 건 묻지 않습니다.) '아, 나도 서울에서 태어나 공부했다면 걸핏하면 출장을 올라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잘 풀렸다면 지금 이런 분들과 함께 문선이나 조판, 교열쯤을 하고 있을 텐데…….' 했던 것이었습니다. 혹 사람을 웃기려고 이런다고 하실까 봐 이 얘기도 해버리겠습니다. 대방동 그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을 한 어느 겨울 저녁, 몇몇 교원들, 회사 직원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2차로 노래방엘 가게 되었는데 우리와 합석한 공무국의 한 여직원이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해서 몰래 그 이유를 물었고 시골에 혼자 계신 조모를 생각하면 그런 여유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얼굴은 금방 잊었지만 다소곳이 차가운 그 거리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던 그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보이는 듯합니다. 지금 제 얘기가 노래방에 가는 게 못마땅하다는 게 아니라는 건 짐작하실 것입니다.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혹은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 같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어서 따져볼 필요가 없음에도 가치관의 혼란 같은 걸 느끼거나 의문을 가지게 될 때 자주 그분이 생각났지만 굳이 그 이유도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저는 다만 교과서 회사 직원들이 다른 회사 직원들보다 훨씬 더 좋고 아름답게 느껴졌을 뿐이었습니다.

 

  대방동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양재동의 '대한교과서'에도 행복하게 드나들었고 내판 공장에 내려갈 때도 언제나 즐겁고 신나고 어쨌든 참 좋았습니다. 교육부 선배들 중에는 빙그레 웃거나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렇게 회사에 꿀벌 드나들듯 오가도 괜찮겠는지 넌지시 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훗날 그런 선배님들은 혹 내가 회사로부터 특별 대접이나 받는 걸로 의심했을까? 덜컥 사정(司正)에 걸려 쫓겨나는 꼴을 보겠구나 싶어 했을까? 뒤늦게 생각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다 옛날 일이 되었으니 왜 그러시는지 물어보거나 걱정하시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출장을 다니면 사무실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지 모르겠다는 것일까? 정도로 생각했고, 그렇다면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싶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려고 혼신을 다했습니다. 내판에서 지역교과서를 만들 때는 교육부 차관을 지내신 조규향 사장님이 나타나 악수를 해준 적도 있고, 편집국 직원 한 분이 어느 한옥 식당에 가서 다슬기국밥을 사주어서 맛있게 먹었던 일도 잊히지 않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니까 마침내 이런 대접도 받는구나!'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교과서 인쇄하는 곳에 갈 때마다 정말 신이 났었습니다. 우리가 쓰거나 준비한 원고와 삽화들이 그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 책이 되어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이지 제가 교과서 회사 직원이 되지 못하고 교사가 된 것이 분하고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공장 식당에서 꼬박 한 달간 식사를 했는데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를 만드는 회사의 밥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양재동 사옥이나 조치원 공장은 눈에 선합니다. 눈감고 휴게실이나 식당, 혹은 어느 곳으로 가라고 하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저는 퇴임을 한 지 8년째인 지금도 교과서 회사에서 일하는 분들 생각을 하고, 꿈도 일쑤 그런 꿈을 꾸고, 멀쩡한 날에도 교과서 생각을 하며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과서 만드는 일을 한다면 덮어놓고 존중·존경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실망스러운 분도 만나게 되고 그런 분은 영 잊히지 않았습니다. 어느 회사의 교과서 연구 회의에 참석했을 때 만난 분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 출판사 사장님이나 전무, 상무님의 표정으로 보아 그분들께서 애지중지하는 사원이 분명했지 싶은데 자신이 발언할 차례가 되자 벼르고 있었다는 듯 호기롭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교과서를 개발하는 사람으로서 학교 현장 선생님들께서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교과서인데도 그것을 흔히 재구성해서 가르친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날부터는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께서 우리가 만든 교과서 그대로 가르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꿈이 실현되는 그날까지!!! 저는 교과서 개발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분은 자랑스럽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았고 모두들 손뼉을 쳐댔지만 저는 '저런 사람이 교과서를 만드는 한 우리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겠구나!' 싶을 뿐이었습니다.

 

  교과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드물진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교사들 중에도 그런 교과서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숱할 것 같고, 학자들이나 교육행정가들 중에도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수두룩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내가 설명해줄게, 잘 들어봐!" 하는 교육자가 많고, 그게 교수든 교사든 학자든 행정가든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 중에도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해주고 가르쳐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경우가 많은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말로는 무슨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부르짖고 말로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지식을 많이 알려주기보다는 창의적 사고력, 문제해결력 같은 기본적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교과서!" 하면 당장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설명해주어야 속이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이런 거야!" "너희들은 각자 창의적 사고력, 문제해결력을 길러야 해! 이런 게 바로 앞으로의 사회에서 요구될 역량이야!"……하고 설명함으로써 그 설명만으로 모든 걸 끝장 내려 드는 것입니다.

 

  한심한 경우야 어디 그런 경우뿐이겠습니까? 저는 "1 교과 다 교과서"라는 말이 나왔을 때 워낙 큰 감동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교과서를 가냘프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맥이 다 풀립니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아득한 느낌을 갖게 되고, 요령을 생각해낼 수가 없어서 아예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학습이 뭡니까? 결국 읽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넓은 세상을 읽어나가는 일! 그렇다면 '넓게' 때로는 '깊이' 읽으면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겨우 다독(多讀)보다는 아무래도 정독(精讀)이 더 좋지 않으냐고 하겠습니까? 지금 그런 걸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라는 건 우리가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옵니까? 오늘, 지금 이 시각에도 고귀한 저 아이들이 읽어나가야 할 그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하고 있습니까? 흔히 하는 말로 새로운 지식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책 한 권이면 다 된다!"는 식으로 압축 요약한 책 한 권을 주고 그 책에 파묻혀 살아가라면 그건 이와 같은 시대에 얼마나 우둔하고 가혹한 일이겠습니까? 나중에 저 아이들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두꺼운 교과서를 주면 그걸 언제 다 외우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걸 다 외우자면 학습 부담이 너무 커서 가혹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혹하다는 경우와 그들이 가혹하다는 경우가 이처럼 완전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차라리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 같으면 교과목별로 지식을 잘 정리한 교과서를 한 권씩 주고 옛 서당에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배우듯 맹렬하게 읽고 쓰고 외우는 A학교와 교육과정과 취향, 능력에 따라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 놓고(안심하고!) 실컷 찾아 읽을 수 있는 B학교가 있다면 두 가지 학교 중 어느 학교에 자녀를 보내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교사나 교수들 중에는 자신이 가르치는 경우와 자신의 자녀를 보내는 경우를 구분하여 각각 다르게 선택하는 분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아이는 B학교에 보낼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다들 그렇진 않아! 내 설명을 듣는 게 나은 애들이 대부분이야!") 우리가 그것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어쩐지 날이 갈수록 지식을 모아 잘 정리하는 일은 컴퓨터가 하는 것 아닌가 싶고 학생들은 그런 공부에는 정이 떨어져 공부 자체를 싫어하고, 강의 듣는 일 자체를 혐오하지만 그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 수가 없어서 비뚤어지고 남을 괴롭히고 엉뚱한 짓을 해보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또한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알파고 얘기를 끌어와 이제 사람들은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을 파헤쳐가는 학습에 열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교과서 얘기를 하다가 딴 길로 와버렸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자면 오늘 중으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그 교과목 교과서 전문가가 지휘하면서 교과서(교재)를 만들 시대가 내도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 그렇게 일하자면(=살아가자면!)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전문성과 역량, 열정을 가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요령이 없어서 이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는 전문가는 하필 대학교수여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교수는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이 전문인 사람 아닙니까? 물론 대학교수나 초중등학교 교원 중에도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특별한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교과서를 개발하는 회사의 편집인이라면 조건이 더욱 좋을 것 아닌가 싶어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나 교원들은 평소 교과서 연구에만 매진하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교과서 회사의 편집인들은 밤낮없이 그것도 평생을 그 일만 할 수 있으므로 당연히 훨씬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연구는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학자들이나 교원들 눈치나 보면서 틀린 글자나 몇 개 찾고 앉아있다면 누가 전문가 대접을 하겠습니까? 누가 교과서 개발 일을 전담하라고 하겠습니까? 누가…….(그만두지요.)

 

  교과서 개발 방법은 다양하다고들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마치 '다양하다'는 말 자체의 가치에 기대어 이야기하는 꼴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학습을 한낱 자료에 지나지 않는 교재(교과서)에 맞추어야 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우스운 일이죠. 그러므로 교과서(교재)의 이러한 상황도 다시 더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개선되는 길을 찾게 되고 그 길로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날, 교과서(교재)로써 살아가는 이들이 그 길잡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기이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걸어보지도 못한 길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라리 어느 교과서 회사 직원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