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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어느 편집인의 교과서관-교재의 재구성-

by 답설재 2015. 9. 24.

A 출판사의 교과서 개발 연구 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본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인사치례로 사장, 전무, 상무, 팀장이 차례로 한 마디씩 했습니다. 자원 인사가 회사를 방문한데 대한 덕담 수준이었으으로 그 발언들은 하나같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편집 실무자 차례가 되었습니다.

 

"교과서 개발 업무를 진행하면서 일선 학교에서 학생 지도에 전념하시는 선생님들 말씀을 경청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과서 이야기만 나오면 선생님들 말씀은 거의 언제나 교육과정과 교과서 재구성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룹니다.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듣고 있기가 참으로 난처하고 송구스러워서 어떻게 하면 여러 선생님들께서 편안하게 가르치실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제 힘으로 그런 교과서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기특하고 고마운 생각입니까? 아니나다를까 사장과 간부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담당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어려운 자리에서 좋은 내용을 조리있게 발표했으므로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를 보내주었습니다.

 

교과서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더 이상 손도 댈 필요 없이 '천자문'이나 '명심보감' '논어' '성경'처럼 그대로 갖다 쓰면 되도록 하고 싶다는 그의 이야기에 만족할 사람이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우선 그렇게 생각할 교사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발언에 불만스러워 할 사람,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교과서란 도대체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수학을 소재로 그 두 가지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과목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1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은 세계 최고의 교육을 자랑하는 핀란드와 함께 늘 1~2위였고, 2013년 12월에 발표된 성적에서도 우리가 1위였습니다.2 뿐만 아니다. 42개국이 참여한 최근(2011년)의 국제수학·과학성취도평가(TIMSS)3에서도 초등학생(4학년)은 2위, 중학생(2학년)은 1위였고, 중·고등학교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에서도 우리나라는 2012년에는 1위, 2013년에는 2위를 차지했습니다.

 

찜찜한 구석이 있다면 학생들이 수학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뿐입니다. PISA에서는 수학에 대한 불안감은 아주 높은 반면 수학의 효능에 대한 관점이나 자아개념은 최하위였고, TIMSS에서도 우리 학생들의 수학 흥미도는 42개국 중 41위, 자신감은 38위였습니다. 수학 성적은 최고이면서 수학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받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4 그것은 우리가 교과서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여실히 드러납니다.

"교과서는 당연히 중시하면 그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교과서는 성전(聖典)이고 그 내용은 금과옥조(金科玉條)니까 군소리 없이 섭렵시키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여기는 전통적·관습적 관점이 지배적이지만, 교과서는 학습자료, 학습도구일 뿐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나라들 중에는 1990년대 이후로 후자의 입장이 된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1970년대부터 그런 관점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입 전형 준비라는 현실적 장애 때문에 변화를 외면하고 교과서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설명)하는 데 치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학원에서도 그렇게 하고. EBS 수능 방송도 그렇고, '인강(인터넷 동영상 강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학교에서도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현상이 일반화되었으니까 창의적 활동, 토론, 협력학습 같은 건 구경하기도 어려워서 흥미는커녕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는 것이 수학입니다. "죽으나 사나" ▶ 주어진 문제를, ▶ 정해진 시간에, ▶ 틀리지 않고, ▶ 남보다 먼저 풀어야 하는 케케묵은 관점을 고수하고 있고, 그런 조건으로 끈질기게 경쟁을 부추기는 세력도 있습니다.

 

더러 수학 교과서의 문제들을 왜 다 풀어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희한한 아이가 나옵니다. 교과서의 공식대로 풀지 않고 괴이한 방법으로 풀었다고 감점을 받고, 학원의 선행학습을 하지 않고는 결코 특목고에 입학할 수 없다는 '협박'도 받습니다. 이게 바로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렇게 배워서 수학자보다는 의사가 되는 것을 좋아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 또한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과서가 필요할까요? 아니, 우리가 만드는 교과서들은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떤 주제로 가르치고 배우든 세상의 수많은 자료 중에서 단 하나의 최적의 자료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과서 하나만으로 가르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 수준이나 취향, 적성 등이 단 한 명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이 좋아할 자료도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교사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료라 하더라도 교사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적절한 자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과 정보, 그러한 지식과 정보에 연결되는 사회상은 잠시도 정체되지 않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배워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교과서의 내용을 재구성해서 가르쳐야 할 이유는 더 열거되어야 합니다.

어쨌든 교과서의 내용 그대로 설명하고 마는 수업이라면 누구나 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교사에게 무슨 고도의 전문성이나 자율성 같은 게 필요하겠습니까?

아마도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 중 가장 단순하고 수준 낮은 방법이 일률적으로 설명하고 듣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교육 수준이 아주 형편없는 나라를 빼고는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나라가 몇 나라나 될까 의심스럽습니다.

 

앨빈 토플러는 이미 35년 전에 '시간 엄수' '복종' '지속적인 반복작업'이 산업 사회 교육의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시간 엄수' '복종' '지속적인 반복작업'

그것은, 교과서 내용 전달 중심 교육의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과서의 내용을 철저히 전달하기 위해 토플러가 지적한 그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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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ECD 회원국 중 의무교육 종료 단계에 있는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읽기, 수학 교육, 과학 교육, 문제 해결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국제적인 비교를 통해 교육 방법을 개선하고 표준화 관점에서 학생의 성적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연구 프로그램의 개발이 1997년 시작되었고, 제1차 조사는 2000년 이후 3년마다 조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0년 조사 이후, 2003년에는 제2회 조사, 제3회 조사는 2006년에 이뤄졌고, 가장 최근에 이뤄진 조사는 2009년이다.학문은 매번 메인 테마가 읽기, 수학 교육, 과학 교육 순서대로 메인 테마가 옮겨 간다. 따라서 2000년은 독해력, 2003년 수학 교육, 2006년 과학 리터러시(문해율)를 메인 테마로 다루고 있으며, 2009년에는 독해, 2012년 수학 교육, 2015년 과학 리터러시를 메인 테마로 다룰 예정이다.(위키백과에서).
2. 미국·영국·일본 등 OECD 회원국 34개국, 중국·브라질·러시아 등 비회원국 31개국이 참가.
3. 수학·과학 성취도 추이변화 국제비교 연구(Trends in International Mathematics and Science Study, TIMSS)는 세계 각국의 4학년과 8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다. 1995년에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 협회(IEA)에서 고안하여 4년마다 한 번씩 이루어지고 있다.(위키백과에서).
4. 2014년 8월에는 세계수학자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려 전세계의 수학자 5000여 명이 몰려왔는데, 우리는 아직 필즈상을 단 한 명도 받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아쉽고 쑥스럽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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