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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식자우환(識字憂患)

by 답설재 2017. 4. 9.






식자우환(識字憂患)






                                                                                                                       2016.5.18.

                                                                  가족과 연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대부분입니다.





    1


  프랑스 시골의 가장 고질적인 신화 중 하나가, 멀쩡하게 건강했던 사람이 어느 날 산동네에서 내려갔다가 실수로 엄벙덤벙 진료소에 발을 들인다는 내용이다. 그런 후 몇 주 지나지 않아서 (누가 이야기를 전하느냐에 따라 때로 며칠, 심지어는 몇 시간 만에) 그는 묘지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게 된다나.1


  줄리안 반스라는 영국 작가가 쓴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라는 책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형(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형은 영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기 전에 귀를 세척하러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한창 귀를 세척해주던 간호사가 형에게 혈압을 재주겠다고 했다. 형은 거절했다. 간호사는 혈압 검진은 무료라는 것을 강조했다. 형은 그야 당연히 무료겠지만 그래도 검사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마주한 환자가 어떤 부류인지 알 리 없었던 간호사는 그 정도 나이가 되면 고혈압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형은, 간호사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방송됐었던 한 라디오 쇼에서 목소리가 웃겼던 사람을 흉내내며 자기 뜻을 관철했다.

  "난 알고 싶지 않아요."2



    2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을 드나들며 지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겠느냐고 묻겠습니까?


  병원비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치료 부위에 따라 6개월, 혹은 1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고, 그 유예기간을 주는 의사에게 감사(!)하면서 그 의사들이 명령으로 지정한 날 지정한 시간에 머리를 조아리며 한치의 착오도 없이 다시 찾아가는 신세가 되었으며, 병원을 찾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한번 드나들게 된 방(가령 내과, 치과, 내분비과……)을 죽기 전에는 벗어나기가 어려워지게 되지만, 이런 일들을 우스개 삼아 이야기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내겐 다 엄연한 사실이라는 걸 실감하며 살아갑니다.


  '식자우환'은 이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겠지요?

  사전에는 "학식 있는 도리어 근심 일으키게 된다는 말"이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지식이 쌓이면 병이 된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학자들이 어처구니없다고 할 테니까요.

  식자우환(識字憂患),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것이 낫다는 의미쯤?



    3


  병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께름칙해서 말도 꺼내기가 싫습니다. 지금도 병원에 드나들긴 하지만 어느 날 그 병원에서 내 몸 어디에 어떤 고약한 징후가 보인다면서 이만 해도 아직 살맛까지 잃지는 않은, 그래서 때로는 잘난 체하고, 때로는 언제까지나 혹은 몇십 년은 더 살 것처럼 나대는 나의 상태를, 갑자기 깜깜해질 수밖에 없는,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선, 그런 상태로 바꾸어버릴 정보를 내밀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끝장이겠지요. "묘지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다"! 정말 그럴 것 아닙니까?


  이만큼만 생각해도 될 텐데 뭐 하려고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겠습니까?








  1. 줄리안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NOTHING TO BE FRIGHTENED OF』(다산책방, 2016) 252쪽. [본문으로]
  2. 위 책 25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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