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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홍당무》

by 답설재 2017. 2. 21.

쥘 르나르 Jules Renard 《홍당무 Poil de Carotte

이가림 옮김, 동서문화사 2013

 

 

 

 

 

 

1

 

아버지 르픽 씨, 어머니 르픽 부인, 형 펠릭스, 누나 에르 네스틴.

소년(막내)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냥 "홍당무". 머리카락이 빨갛고 얼굴이 주근깨 투성이인 홍당무. 아무래도 호감을 살 수 없는 얼굴이란다.

 

밤중에 닭장 문을 닫으러 간다. 형도 누나도 싫어하는 일이다.

 

여우나 늑대가 손가락이며 볼에 입김을 불어대는 게 아닐까? 이렇게 되면 이젠 어둠 속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서 짐작만으로 닭장 쪽을 향해 무작정 뛰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손으로 더듬어서 열쇠를 집었다. 홍당무의 발소리를 들은 암탉들이 횃대 위에서 깜짝 놀라 꾸꾸꾸 울면서 푸드덕거렸다. 홍당무는 소리쳤다.

"조용히 해, 나야!"

문을 닫고, 다리와 팔에 날개라도 단 듯이 단숨에 뛰어왔다. 헉헉거리면서도 의기양양하게 따뜻하고 밝은 집 안으로 돌아오자, 진흙과 빗물로 더럽혀진 누더기 옷을 벗고 새로 맞춘 옷을 가벼운 마음으로 갈아입은 듯한 기분이었다. 빙긋 웃으면서 자랑스러운 얼굴로 우뚝 선 채 모두들 칭찬해 주기를 기다렸다. 이젠 안전하다.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그러면서 두 사람의 얼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형 펠릭스도 누나 에르네스틴도 아랑곳없이 책만 읽고 있었다. 르픽 부인은 늘 하는 투로 홍당무에게 말했다.

"홍당무야, 이제부터는 밤마다 네가 닫으러 가렴."(12~13)

 

 

2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히고 홀대를 받는다. 까닭 없이 사랑을 받지 못한다. 밉상이어서 왕따를 당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다.

 

그래도 기가 죽지는 않는다. 꿋꿋하다. 의기소침해하지 않는다. 거침없이 살아간다. 모욕을 당하고 때리고 놀려도 살아남는다.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지내는 형, 누나, 동료들을 시샘하긴 하지만 늘 긍정적이다.

게다가 사색을 즐긴다.

 

 

3

 

특별히 갖고 싶은 책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드 볼테르의 《앙리아드》와 장 자크 루소의 《신(新) 에로이즘》이지만 다른 책이어도 좋으니 기숙사에서 읽을 책 좀 사 달라는 편지를 보내자 아빠는 이런 답장을 보낸다.

 

홍당무야,

네가 편지에 써서 보낸 작가 역시 너나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너 역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도 책을 써서 그것을 읽어 보는 것이 좋겠다.(103)

 

아버지는 가령 사냥에 잘 따라나서는 홍당무가 처음으로 도요새를 잡았을 때에도 어처구니없는 반응을 보였다.

 

둘 중 한 마리가 부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총성의 메아리가 숲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홍당무는 날개가 부러진 도요새를 주워 들고 자랑스럽게 흔들어 대며 화약 냄새를 맡았다.

피람(개)이 먼저 달려왔다. 르픽 씨는 평소보다 더 지체하지도 않고, 더 서두르지도 않으며 다가왔다.

홍당무는 칭찬을 기대했다.

'아빠가 깜짝 놀라시겠지?'

하지만 나뭇가지를 헤치며 나타난 르픽 씨는 여전히 연기에 휩싸인 아들을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두 마리 모두 잡지 못했느냐?"(143)

 

 

4

 

우리나라 같으면 가족들이 그 모양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성적표에 적힌 교장의 평은 다음과 같았다.

 

'하려고만 하면 뛰어난 학생이 될 수 있음. 하지만 언제나 하려고 하지 않음.'(93)

 

결국 단 한 번도 인정을 받거나 하지 못한다. 마지막 이야기에 얼핏 부자간의 이런 대화는 보인다.

 

"그럼, 나는 너희 엄마를 사랑하는 줄 아니?"

참다못해 르픽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말에 홍당무는 눈을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수염이 더부룩한 아버지의 엄숙한 얼굴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수염 속에 너무 말을 많이 한 것이 부끄러운 듯 살짝 숨어 버린 입, 주름진 이마, 축 늘어진 눈꺼풀……. 마치 걸어가면서 졸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 이윽고 홍당무는 주먹을 불끈 쥐어 멀리 어둠 속에 고요히 잠든 마을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고는 그쪽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심술궂은 여편네! 흥, 야박한 심술쟁이 여편네! 난 정말 싫어."

"닥쳐! 그래도 네 엄마가 아니냐."

"아! 꼭 엄마한테 한 말은 아니에요."

홍당무는 금세 순진하고 조심스러운 아이로 돌아가 대답했다.(168~169)

 

 

5

 

"홍당무"를 응원하고 싶다. 늦어서 쑥스럽긴 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늦었을까?'

'내게는 숨겼나?'

'그래도 그렇지, 여태껏 볼 수 없었다니…….'

 

'색종이' 같은 49편의 이야기에 그림이 하나씩 들어 있다. 먹(흑)으로만 인쇄되던 그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처럼…….

이 책이 참 좋다.

아무래도 나는 애들 체질이다. 교사로 태어나 늙어가니까 그런가?

그건 내게 행운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