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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by 답설재 2017. 1. 17.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지현 옮김, 민음사 2015

 

 

 

 

 

 

장 그르니에는 알베르 카뮈에게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내가 맡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칠 책임이 있다는 점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에 대해 가르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들에게 애착을 갖게 되었다. 나의 책무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믿었다."1

 

단순하게(혹은 오만하게) "젊은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 대해 가르친다"고 한 그르니에, "나의 책무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믿었다"고 한 그르니에가 존경스러웠습니다.2

일찍 그를 알았더라면, 나도 조금은 더 나은 교사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우리 교육을 좀 더 깊이 있게 반성하는 교사였을 것입니다.

 

 

1

 

장 그르니에가 유기견 '타이오'의 죽음을 이야기한 에세이입니다.

《멜로디》도 그렇고, 《내가 사랑한 개, 유리시즈》도 그렇고, 《철학자와 늑대》(이건 늑대 이야기지만)도 그렇고, 개에 관한 책마다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개만도 못한……" 자꾸 그 거친 표현도 생각하게 됩니다.

 

한 페이지에 한 가지씩 모두 90가지의 이야기를 쓰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짧은 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타이오'의 죽음을 보고 인간, 생명, 삶과 죽음, 천국, 대자연, 사랑, 믿음, 구원, 평등, 후회, 회한……(다 열거한다면 90가지, 요약하면? 아마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혹은 "생명의 존엄성" 쯤?)을 맥락없이, 맥락없이? 특별한 레퀴엠, 혹은 사랑의 변주곡으로 엮어서, 그 레퀴엠 혹은 사랑의 변주곡을

 

읽을 사람은 읽고,

들을 사람은 듣고,

볼 사람은 볼 수 있게 하여

'인간으로서의 길'에 대한 확신 같은 걸 갖게 합니다.

 

읽거나 듣거나 볼 수 있는 책,

이 책을 단숨에 읽고, 그보다 더 오래 생각했습니다.

특히 90점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아서 '어느 개의 죽음'이라는 주제의 그림 전시장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90점의 그림을 그려넣고 싶었습니다.

 

 

2

 

그 중 한 편을 옮긴다면 어느 것으로 할지, 90가지를 놓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간단하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야기'를 선택했습니다.

 

보다 많은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그러한 염려들이 없으면 늘 소소한 공허감에 젖게 되고, 그보다는 근심, 걱정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젯밤, 과일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내려갈 때, 나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바구니를 잠자리로 삼았던 개는 이제 사라졌으므로 녀석이 깨어나서 밖에 나가자고 조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염려가 내겐 더 행복한 것이었을 것이다.(No 58; 64쪽)

 

'염려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특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적'?

하기야 그건 단순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생각 또한 얼마나 현실적인지……

 

 

3

 

어떤 이들은 자연이 존엄 그 자체의 상징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인간이 비참 그 자체의 상징이라고 한다. 어쨌든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지 못하는 만큼 불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개는, 진정한 의미의 동물이 그렇듯이, 자연 그 자체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대자연의 전능함을 대변해 주는 듯한 녀석을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복받치는 애정을 전할 때, 임종의 고통을 호소할 때, 타이오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녀석의 모습은 같은 상황에서라면 울음을 터뜨렸을 인간의 모습보다 더욱 가슴을 저몄다.(No 76; 82쪽)

 

조만간 나 자신이 타이오와 같은 상황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죽음은 나에게는 서럽고 슬픈 것이지만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예정된 현실입니다. '죽음도 괜찮은 것'이지만 '그 이전의 삶은 애정을 쏟기에 충분한 것'이고 이 삶과 그 죽음을 바라보고 안아줄 저 대자연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알베르 카뮈 때문에 부러운 장 그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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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그르니에·이규현 옮김『카뮈를 추억하며』(민음사, 2012), 10.
2. 카뮈도 그 스승 그르니에를 존경했습니다.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259쪽 작가연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1932년(19세) • 문과(文科) 고등반에서 학업 계속. • 철학교수 쟝 그르니에(Jean Grenier)를 만나 두터운 친분을 가짐. (후에 《표리》와 《반항인》을 그에게 헌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