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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봐, 백인 맞잖아!"

by 답설재 2016. 8. 25.

천사 Celestial 크리스 오필리(영국, 1968년생) 채색 석판, 스크린 인쇄, 39×29㎝

 

 

 

# 1. 검은 천사

 

예술의 전당 대영박물관전("Human Image 영원한 인간" 2015.12.11~2016.3.26)에서 본 그림.

주제넘지만, 화가1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생각하면 괜히 미안해진다.

검은 천사여서 세수를 시킨다 해도 사진으로는 별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좀 자세히 보려고 두 번 찍은 사진.

 

 

# 2. "검은 모세"

 

백인들이 몰려와 성경을 손에 쥐어주고 눈 감고 기도하라고 했다. 눈을 뜨고 나니 그들은 우리의 땅을 빼앗아 갔고 우리 손에는 성경만 남아 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뼈 있는 농담이다. 콩고 출신의 소설가 알랭 마방쿠Alain Mabanckou가 2015년에 발표한 『작은 고추Petit piment』는 검은 대륙에서 태어난 아이의 성장소설이다.

(…)

아이의 이름은 "토쿠미사 느잠베 포 모즈 야모이도 아보다미 남보카 야 바코코"이며 이는 "신에게 은총을 돌려라. 검은 모세는 조상들의 땅에서 태어났다"라는 뜻이다.2

 

"검은 모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연설은 듣고 싶지 않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된다 하더라도……

 

 

# 3. 소와 사자, 말이 그릴 신의 모습(버트런드 러셀)

 

(…)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인들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에도 능가하기 힘들 만큼 개화된 합리주의를 이룩할 수 있었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인간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렇게 말했다. "에티오피아인은 신들의 형상을 검게 칠하고 코도 평평하게 빚는다. 트라키아인은 자기네 신이 파란 눈에 붉은 머리를 지녔다고 말한다. 그렇다. 만약 소와 사자와 말이 손을 달고 태어나 그 손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또 인간처럼 예술품을 만들 줄 안다면, 말은 신의 모습을 말처럼 그릴 테고 소는 소처럼 그릴 것이며 신들의 몸 또한 자기네 품종 몇 가지와 닮게 만들 것이다."3

 

 

# 4. 고대 히브리인들의 외로운 신(조지 오웰)

 

외부 사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이유로 자기네 외의 모든 나라는 '거짓 신'을 숭배한다고 생각한 고대 히브리인 (…) 히브리인은 이런 거짓 신들이 바알, 오시리스, 몰렉, 이슈타르 등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없었다. 아마 그 신들에 대해 모르면 모를수록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키기가 좋았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았고, 여호와의 계명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이름을 가졌거나 다른 속성을 가진 신들은 모두 거짓 신이라고 믿었다.4

 

 

# 5. 최근 한국의 소설에 나타난 신의 모습과 행동(김희선)5

 

신들이 내려온 이후, 나는 중생대 백악기로 시간여행을 온 건 아닌가, 하는 느낌에 자주 사로잡혔다. 거리는 그토록 그로테스크했다. 마치 어릴 적 읽었던 공룡도감의 한 페이지를 펼치고 그 속으로 뛰어든 듯했으니까. 어디로 눈을 돌려도, 가만히 서 있거나 느릿느릿 걷고 있는 신들이 보였다.

때 아닌 호황을 맞은 곳은, 애완용 파충류를 파는 가게였다.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은, 오래전 집 안에 성상을 모셔뒀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파충류를 키우고자 했다. 갖가지 파충류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신들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이구아나는 며칠 만에 완전히 동이 나버렸다.

(…)

"지금 당장 커튼을 열어봐. 그럼 우릴 볼 수 있을 거야."

속는 셈치고 창가로 조심스레 다가간 나는, 벽 뒤에 몸을 붙인 채 커튼을 살짝 들춰봤다. 그러고는 "아악!" 소릴 지르며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창밖에선 노랗고 포악한 눈에 비늘로 덮인 거대한 머리를 가진 티라노사우루스 두 마리가 나란히 유리에 얼굴을 붙인 채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난 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왜, 왜 이래? 아니, 왜 이러십니까? 가까이 오지 마세요, 제발."

그러자 두 마리의 티라노사우루스가 동시에 씩 웃었다. 그러더니 입도 달싹이지 않았는데 그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또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겁내지 마, 인간. 우린 널 해치려 온 게 아니니까. 정말이야. 해칠 거면 벌써 해쳤지. 이러고 웃으면서 들여다보겠어? 그러니 이리로 좀 와봐. 일단은 인사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어?" 결국 난 주춤주춤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게 보리스, 이르까지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6

 

성경에도 적혀 있다고 했지, 아마?

신(저 불가사의한, 과학자 중에는 심각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통과의례처럼 어린애들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폭군 도마뱀' 티라노사우루스)의 강림은 최후의 심판이라고?

 

그럼에도 김희선의 이 소설에서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등장인물은 살아남는다. 누군가를 위해 어려움을 견딘다. 살아 있으므로 살아간다.

 

 

 

 

 

 

이 기사를 보자마자 신이 파충류 티라노사우루스더라는

저 소설이 생각났다.

'이러다가 신이……' 그런 망측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머리를 저었다.

 

"봐, 백인 맞잖아!"

그런 자료를 찾아야 하지만 찾지 못했다. 사실은 굳이 그런 자료를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봤자 "봐, 흑인 맞잖아!" "봐, 소(사자, 말……)가 맞잖아!" "봐, 티라노사우루스가 맞잖아!"…… 그런 말을 하며 다가올 사람들이 줄을 이어 나타날 것 같았다.

 

큰 걱정이라고 할 사람이 많을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내가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신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한 일인가!

지금 그 신들의 종류와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지, 아니면 점점 늘어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건 중요한 일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신이란 존재가 점점 늘어나는 세상이 아무래도 더 좋은 세상일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여러 종류이고 여러 명, 아니 수없이 많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아니라면, 적어도 하나의 신을 두고 동네마다 다 다른 이름, 다른 모습으로 그 신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게 얼마든지 용인되는 세상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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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지리아 태생 40대 화가 크리스 오필리 Chris Ofili , Christopher Ofili. 2015년에는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예술가 부문)'에 올랐다고 한다.
2. 이재룡「콩고 이야기」(『現代文學』2016년 5월호, 364~375쪽).
3. 버트런드 러셀 『인기 없는 에세이Unpopular Essays』(장성주 옮김, 함께읽는책 2013) 중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265쪽).
4. 조지 오웰 『1984』(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2016), 377.
5. * 장편연재소설 『계시』(김희선)(마지막회) 마침내 신들은 돌아간다. 세계를 구원하라는 계시를 받은 스티브는 과거로 통하는 강으로 몸을 던진다.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신의 계시를 적은 스티브의 노트와 '살아남으라'는 말을 남긴 로버트 와인버그의 기록을 노트를 통해 본 아르바이트생은 스티브가 과거로 몸을 던지는 것만이 미래로 되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깨닫는다. 파충류의 모습을 한 신들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초현실적 상상력으로부터 과거부터 미래를 관통하는 한 인간의 가족사를 통해 시공간 체험을 가능케 해준 작가의(...)('현대문학' 2016년 9월호 편집후기에서 옮김).
6. 김희선(장편연재소설 제14회), 『계시』(『現代文學』 2016. 6월호. 42,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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