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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알파고 인간의 모습

by 답설재 2016. 8. 30.






알파고 인간








  인간? 글쎄요. 그것도 인간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긴 하지만 일단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면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 인조인간, 로봇 인간, 알파고 인간…….

  그럼 우리 같은 '사람'을 가리킬 때는 "진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가짜 인간 혹은 로봇 인간(알파고 인간?)을 영화 속에서는 이미 수없이 봤기 때문에 익숙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이름으로는 아놀드 슈워제네거밖에 모르지만 이 배우 저 배우가 그런 인간으로 분장해서 저건 진짜, 저건 로봇 하고 구분해 보기도 합니다.


  "아, 알파고 인간이 출현한 영화를 한 편 감상했다"고 할 것까지는 없는 영화들이라고 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렇긴 해도 심각한 점도 있지 않을까요? 하고 묻고 싶다는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은 진짜 인간들이 가짜 인간들을 색출해서 아예 다 처형해버리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에 몰두하지 않아서인지 '저게 진짜 인간인가 가짜 인간인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진짜 인간 중에 "저 로봇은 진짜 인간보다 더 정서적일 뿐만 아니라 이미 사랑의 감정까지 갖고 있으므로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진짜 인간들 중에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더구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만 하는 넌더리 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당연히 착한 로봇을 죽이지 말자는 쪽의 편을 들게 됩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야기가 나오는 아주 흥미로운 글을 봤습니다. 「"트라우마적 지식은 윤리적 지식이다"―인공지능과 묵시적 상상」(왕은철).1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고리즘 알파고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한국의 천재기사 이세돌을 압도했다. 경우의 수가 많아 세계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게임으로 알려진 바둑을 알파고가 그토록 잘 둘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직관과 추론 능력, 학습 능력을 갖춘 알파고한테 바둑천재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세돌 기사의 맞은편에는 아자 황 Aja Huang이라는 타이완계 구글 직원이 앉아 있었다. 얼핏 보면, 그는 이세돌 기사와 대국을 하려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기사처럼 보였다. 그는 표정이 없지만 부드러운 얼굴로 앉아서 신중하게 돌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국자가 아니었다. 대국자는 그의 옆에 있는 존재, 아니 존재가 아니라 기계였다. 그는 그 기계의 지시에 따라 바둑판에 돌을 놓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참으로 기이한 장면이었다. 화면에 비친 인간과 컴퓨터의 대국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것은 인조인간에 조종당하는 미리에 대한 묵시적 상상으로 이어졌다. 대국 장면은 그래서 알레고리였다. 인류가 언젠가 직면하게 될 것만 같은 디스토피아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앞의 인용은 단순히 당시의 상황을 나타낸 부분이고, 뒤의 인용은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입니다.




                                                                                       조선일보, 2016.3.22(구글 제공)





  부끄러운 고백을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저 아자 황이라는 사람이 알파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가 누군지, 진짜 인간인지 알파고 인간인지 분명하게 알려주는 걸 못 본 것입니다. 알려주었는데 무심코 들었을까요?


  그렇게 오해할 수 있잖습니까? "이세돌이 알파고와 바둑대결을 한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마치 알파고인양, 이세돌은 그 좌석에 앉아서도 온갖 표정과 동작을 다 보여주는데(가령 고심하고 초조해하고……) '가짜 알파고'인 그는 자신이 알파고인양 미동도 않고 별다른 표정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요.


  만약에 말입니다.

  언젠가 알파고 인간들이 우리 진짜 인간들에게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바로 그런 상황이지 않을까요?

  저 아자 황처럼, 우리가 이세돌처럼 무너지는 걸 바라보면서도 태연자약하지 않을까요? 나는 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듯 무표정하게 미동도 없이 우리가 무너지는 걸, 우리 인간들이 무참히 쓰러지는 꼴을 태연자약 바라보기만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들의 수작을 알아채고 그 수작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걸 보면서도 '이것들이 우리를 이겨내는지 보자!' 하고 수수방관하지 않을까요?





  혹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들 진짜 인간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걸 다 인지하면서도 "나는 기계인간이어서 그런 건 모른다"며 "나는 사랑♥ 같은 것도 모르듯 아픔과 괴로움 같은 것도 모른다"면서 인류의 최후를 방관하는 핑계를 대지 않을까요? 아자 황처럼!


  아자 황은 이세돌이 무너지고 괴로워하는 걸 어떻게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었을까요? 무표정하게, 무감각인양…….

  알파고의 어떤 '무서운 지시'를 받고 그렇게 한 건 아닐까요? 가령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너는 미동도 보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어기면 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는, 만약 구글 직원이라 해도, "너는 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바둑돌을 옮겨놓아야 한다"는 '강력한' 지시를 받았다 해도, 그렇게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을 것 같았습니다.

  아, 나는 지금 결코 아자 황이라는 그 사람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그건 누구라도 알 것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장면입니다.2


  작은 사내의 까만 눈이 먼저 현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 얼굴을 향해 깜빡거렸다. 그 태도에 친밀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남자는 그들의 외모는 기억하겠지만 아무런 관심도 없는 표정이었고, 뭐 하나 느끼는 것 같지가 않았다. 윈스턴은 성형수술한 얼굴은 표정을 바꾸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은 말 한마디, 인사 하나 없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1. 『현대문학』2016년 5월호(324~340쪽), 트라우마와 문학(연재) 제15회. 인용 부분은 325쪽. [본문으로]
  2. 조지 오웰 《1984》(김기혁 옮김, 문학동네, 2016 2판19쇄), 21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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