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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물리학자의 立秋

by 답설재 2016. 8. 10.

 

 

 

 

저 신록의 계절, 저때만 해도 괜찮았다.

괜찮았다기보다는 의욕에 차 있었다. 올해도 손자손녀를 보러 열 몇 시간 걸리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각오가 무색하게 여름이 오자마자 미국행을 포기해서 손자손녀 일행이 다녀가게 하더니, 수소폭탄 원리를 연구해서 생활 에너지로 쓰게 되면 환경오염도 막을 수 있고 이상기후 같은 것도 해결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그리 수월하지 않은 연구라는 둥 어떻다는 둥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까지 했다.

 

 

 

 

마침내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고 열대야가 계속되던 지난 주말에는 이런 여름이라면 지쳐서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다. 더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은 마지막에 이르면 모르핀이나 놓아달라고 하지 결코 다른 치료는 요청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이분이 왜 이러나 싶고, 칠십여 년 주민등록지에서만 이런 여름을 고스란히 견뎌낸 나는 그가 지치고 견디기 어려워하는데 대해 매우 미안하게 느껴지기까지 해서―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였다는 대통령은 이미 저세상으로 갔기 때문에 호소할 만한 곳도 얼른 떠오르지 않고― 곧 여름이 물러갈 것이다, 오는 일요일(7일)이 입추다, 그러면 풀벌레 소리도 달라지고 햇살도 기가 죽는다고 했더니 '씨익' 미소만 짓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 이런…… 그건 그런 말은 신뢰할 수 없다는 표시였다.

내 생각으로는 절기(節氣)도 과학이지만 현대과학을 전공한 세계적인 과학자가(그는 밖으로 나갈수록 더 유명한 사람인 것 같다는 게 내가 파악한 그의 개요다)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데야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하기야, 그날인가 그 전날인가, 고기압·저기압 같은 걸 전문으로 연구해서 발표하는 일기예보에서는 앞으로도 이런 더위가 한 열흘 정도 더 이어지겠다고 장담(!)했으니 나의 그 어정쩡한 말이 '과학적으로'(위안을 삼고 싶은 근거로) 들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유난히 덥다는 이 나라의 올여름 날씨도 입추 다음날부터 진짜로 달라지고 있었다.

아직 덥기야 덥지만 그래도 "열대야" 소리도 잦아들게 되었고, 무엇보다 풀벌레 소리에 힘이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대충 이런 내용이 보였다. '입추 후 열흘간은 양(陽)의 기가 남아 있어 대단히 덥긴 하지만 10일 이후 3일간은 수기(水氣)가 돌기 시작하고 그 후로는 가을 기운이 왕성해진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나는 언제나 가을은 이렇게 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기억이 맞는 건지는 모르겠다. 모두들 서둘러 떠날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기는 산기슭이어서 시내보다 기온이 좀 낮긴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아예 선풍기조차 예비로 그냥 세워두기만 했다.

 

 

 

 

그를 만나면 여름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가리켜 보이고 싶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기야 겨울인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고 여름이든 겨울이든 다 좋다며 활기차게 지내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걸 보면 가는 여름을 조롱할 일도 아니다.

나의 선친은 드물게 이런 것을 강조하셨다. "사람이 좋다고 해서 쉽사리 미소를 짓는 것은 경망스럽다. 그렇지 못할 때 낯빛이 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기야 그 겨울 뒤로 곧 얼굴을 내밀 다음해 여름이 화가 나게 해서 좋을 일도 없을 것이다.

 

 

 

2016.8.9(저녁). 풀벌레 소리가 여전하던 나무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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