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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by 답설재 2016. 7. 13.

 

 

 

로맹 가리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16(2판18쇄)

 

 

 

 

감상적으로 보이는 제목을 보고 읽지 않은 책이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12)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안데스 산맥 발치의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 자크 레니에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이곳에 와서 죽는 새들처럼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해변의,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세상 끝에 있는 카페 주인 자크 레니에에게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섬세한 얼굴에 아주 진지하고 커다란 두 눈이 맑고 아름다운―에머럴드 빛이 감도는, 바다 같은, 약간 멍하고 맑고 깊은― 여인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마침내 세상을 품에 안아 더 나은 운명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부드럽고 무구한 어깨짓을 느낀다.

스스로 끝내고 싶었고,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더이상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 여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가슴에 꼭 안고 그는 이따금 자신의 두 손 안에 묻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불현듯 수십 년간의 고독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아홉번째 물결이 그를 쓰러뜨리고는 그녀와 함께 먼 바다로 그를 휩쓸어갔다.

"원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간절히 원해요."(28)

 

그러나 그런 것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 반지 들을 준 영국인이 찾아오고, 그녀는 그녀를 조롱하고 위협하는 주정뱅이, 무언가 원한에 찬 그 사내를 혐오하면서도 그 일행을 따라나선다.

 

그녀야말로 왜 이곳 모래언덕까지 와서 죽으려는 것인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새일 터였다. 한 가지 설명은 있어야 하고 언제나 있을 테지만 모른들 무슨 상관이랴.(22)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류트」

「어떤 휴머니스트」

「몰락」

「가짜」

「본능의 기쁨」

「고상함과 위대함」

「비둘기 시민」

「역사의 한 페이지」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지상의 주민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마음이 한가롭지 않은데도 몰두할 수 있었다.

 

반전(反轉)이 어색하지도 않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반전이 거듭되어도 어색하지 않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대단한 존재구나 싶었다.

 

 

 

인간이라―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더 참고 버텨야 해. 일만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자취와 몽상과 예감뿐이지만―지금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사샤 치포츠킨, 『달빛 산책』 중에서

 

책 머리의 인용, 열여섯 편이 줄곧 이 이야기였다.

"인간이 되려면 좀더 기다려야 해. 일만 년쯤만."

 

 

 

이 인용에 따라 거듭되는 반전(反轉)에서 슬픔과 함께 행복을 느끼게 한 경우의 예를 들면 「지상의 주민들」.

하노버 출신 장난감 도붓장수, 주정뱅이 노인 아돌프 카닌헨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없이 긍정적이다. 눈보라 속에서 눈먼 소녀와 함께 함부르크로 가고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 눈먼 소녀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길은 멀고 춥고 눈보라가 몰아쳐서 애써서 히치하이크*를 한다. 트럭 운전사는 눈먼 소녀에게 눈독을 들인다. 중도에 노인을 내리게 하고 소녀만 태우고 가버린다.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트럭이 사라져간 길을 달려간다. 드디어 화장은 뒤범벅이 되고 옷매무새도 흐트러진 소녀를 만난다.

알고보니 트럭 운전수는 그들을 함부르크의 반대 방향으로 데리고 가던 중이었다.

 

"가자" 하고 남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젠 다 왔단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하얀 밤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258)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막힌 반전도 있다. 가령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안데스 고원 지역에서 '파리의 재봉사'로 성공한 쇼넨바움의 친구 그루코만은 속으로는 나치 독일의 패망을 믿지 않는다. 유대민족이 이스라엘을 세우고 군대와 사법부와 정부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믿지 못한다.

성공한 친구 쇼넨바움의 도움을 다 받아들이지만, 집 안 깊숙한 곳에 '토렌베르크 수용소의 고문 기술자였던 나치 친위대원 슐체'를 숨겨두고 있다.

그루코만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쇼넨바움은 몰래 그의 뒤를 따라가 슐체의 존재를 발견한다.

다음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다.

 

"저놈은 일 년여 동안 자네를 매일같이 고문한 자가 아닌가! 저놈은 자넬 괴롭히고 학대하지 않았나! 그런데 경찰을 부르는 대신 저 작자에게 매일 저녁 먹을 것을 갖다주다니? 그럴 수가 있나?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희생자의 얼굴에 떠오른 교활한 표정이 뚜렷해졌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아주 오래된 목소리가 재봉사의 머리카락을 쭈뼛 곤두서게 했고,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가 다음번에는 잘해준다고 약속했다네!"(290)

 

우리에게도 일제 36년의 지배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일들이 있다. 악몽…….

 

 

 

* 지나가는 자동차에 무료로 편승하면서 여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