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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고미카와 준페이 《인간의 조건》

by 답설재 2016. 7. 8.

고미카와 준페이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

유창위 옮김, 글사랑 1993

 

 

 

 

 

 

 

언제까지 걸어도 끝이 없다. 둘이서 걷는 길이란 그런 법이다.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긴요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이야기하고 싶으면서도 피하고 있다.

초저녁 어둠이 밀려오는 가운데 솜 같은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춥지는 않았다. 만주에서는 이런 눈은 흔하지 않다. 흔히 모래알처럼 사락사락하며 바람에 날려 살갗을 자극한다. 그러나 지금은 가볍고 부드럽게 감싸는 것만 같았다.

거리 모퉁이에서 두 사람은 발길을 멈추었다. 인적은 드물었다. 창턱에 눈이 쌓이기 시작한 창문마다 불빛이 따뜻하게 새어나오고 여기서부터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냥 이대로 갈까요?"

미치코(美千子)가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을 했다.

가지(梶)는 미치코의 어깨 너머로 모퉁이에 있는 가구점 진열장을 보고 있었다. 미치코도 가지의 시선을 따라 장식용 벽걸이 접시를 보았다. 로댕의 〈베제〉를 모사(模寫)한 그림을 구운 것이리라. 나체의 남녀가 서로 꼭 껴안고 있었다.

가지의 시선이 거기서 떨어져 허공을 방황했다. 미치코가 그 시선을 잡았다.

"당신답지 않아요."

"왜?"

"피하고 있으니까요."

남자의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강렬하게 빛났다. 그것이 초점을 맞추어 자기에게로 쏠리자 여자는 가슴이 벅차 올라 견딜 수 없었다.

"난, 납득할 수 없어요. 아무리 전쟁중이라지만 사랑하고 있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니……"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야."

"왜요?"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가지는 다시 벽걸이 접시를 보았다. 미치코는 가지의 폭넓은 외투 어깨 위에 쌓인 눈을 어루만지다가 그 깃을 가만히 잡았다.

"갖고 싶지 않아요? ……나를."

"물론 갖고 싶어!"

이 말은 격렬했다. 청년의 욕망이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나도 갖고 싶어요. ……그런데 어째서 결혼할 수 없다는 거예요?"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지?"

"몰라요! 듣고 싶지 않아요."

(제1권, 9~10)

 

 

눈이 내렸다. 보기 드문 솜 같은 함박눈이다. 눈은 초저녁 어둠 속에서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곳은 추수가 다 끝나고 잘라낸 그루터기만 질서 있게 남아 있는 끝없는 수수밭이었다. 그 수수밭 끝에 길게 뻗쳐 있는 산기슭에서는 지나가다 날 저문 나그네에게 손짓이라도 하는 듯한 따뜻한 등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득힌 먼 곳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아직 노호령에 닿으려면 멀었는데도 가지에게는 그 먼 곳이 잠시도 잊을 수 없는 노호령으로만 보였다.

미치코, 드디어 나는 돌아왔소!

기쁨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가지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밤의 장막에 덮여 어슴푸레해진 광야는 끝없이 펼쳐진 것 같았지만 아득한 저편에서 반짝이는 불빛과 가지 사이에 점점이 서 있는 전신주 하나하나가 확실한 도표(道標)가 되었다. 그것을 세면서 더듬어가면 된다. 그날 저곳을 떠났다가 오늘 저녁 그곳으로 돌아간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던가!

피로가 기분 좋은 쾌감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황홀했다.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한결같은 정열과 노력이 이제야말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자신의 고행이 눈물겹고 대견했다. 미치코, 나를 좀 봐다오. 여기까지 온 나를. 이젠 걱정 없다. 여기서 잠깐 쉬게 해다오. 조금만 쉬라고 말해다오.

가지는 수수 그루터기 사이에 주저앉았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우러러보다가 생각난 듯 네모난 만두를 꺼냈다. 그것은 이미 돌처럼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가지는 그 만두를 뺨에 대고 희미하게 웃었다. 이것을 갖고 돌아가서 미치코에게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7백여 일 동안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이것이 단 하나의 선물이었다.

아무 말 않더라도 이것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리라. 이 사람은 이렇게 해서 사랑하는 여자에게로 돌아온 것이라고.

미치코, 당신은 기뻐해줄 수 있을까? 그곳을 나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해줄 수 있을까?

이제 다 왔다. 나는 내내 괴로움과 나란히 걸어왔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난다. 오늘밤 나는 당신을 만나보겠지.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손으로 만져보아, 생각해낼 것이다. 그렇다. 잃은 것을 오늘밤 모조리 다시 찾을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 단 5분만 쉬게 해다오. 그러고 나서 가겠다. 반드시 오늘밤 안으로 닿을 테니까.

초저녁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사이사이에서 아득한 불빛이 반짝거렸다. 가지는 그 불빛을 바라보며 행복한 듯 몇 번이나 빙그레 웃었다. 아, 이제는 미치코에게 안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미처 다 꿀 수 없었던 꿈이 바로 저곳에 있다. 평화롭게 깜박이면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잠깐 쉬었다가 기운찬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미치코, 당신과 내 생활은 오늘밤부터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가지는 그곳이 마치 푹신한 잠자리이기라도 한 듯 등을 펴고 그루터기 사이에 편안하게 누웠다. 미치코가 문을 열고 뛰어나와 뛸듯이 기뻐할 그 순간의 얼굴과 안에서 탁탁 소리내며 타고 있을 따뜻한 불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은 더 많이 쏟아졌다.

먼 곳은 불빛만이 희미하게 반짝거릴 뿐인 어두운 광야를 발소리를 죽이며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눈은 고요히 쉴 새 없이 내린다. 내리자마자 쌓여가는 눈은 이내 사람이 누운 모습의 낮고 조그만 언덕을 만들기 시작했다.

(제5권, 315~317)

 

 

 

전 5권의 각 표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인간이 만든 지옥의 땅에서 부르짖는 생명의 존엄성과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감동의 대하소설!"

 

1. 빛과 어둠

2. 생명

3. 들불

4. 풀잎처럼 서다

5. 인간의 길

 

1993년에 읽고 23년을 가지고 있었다.

23년만에 펼쳐서 제1권의 시작 부분과 제5권의 마지막 부분을 옮겼다.

23년……

무엇이든 이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결국 이렇다. 그렇지만 더 생각하지는 않기로 하자.

 

그땐 몰랐는데 첫 장면은 '닭살'이어서 좀 '간지러운' 느낌이고,

이 소설 속의 전쟁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게 불분명해서 답답하기도 하다.

 

「아베 '전쟁하는 일본' 야망 이루나, 참의원 선거 개헌선 확보 가능성」(한겨레, 2016.7.7.17).

「전쟁할 수 있는 일본으로… '아베의 꿈' 실현되나」(조선일보, 2016.7.8.A16).

 

'전쟁이 일어나야 뭘 쓸 텐데……'

그런 미친 사람은 없겠지. 그렇지만 그런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쓰지 않는 사람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보! 절실하다면 '닭살'이 대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