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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소지燒紙를 태우며」

by 답설재 2016. 5. 10.

소지燒紙를 태우며

 

 

강병길

 

 

윤달의 빈 시간을 다투어

아버님의 봉분을 헐었다

보늬로 남은 수의 안의

죽간처럼 가지런한 갈비뼈를 읽고

표정을 벗어난 두상은 햇볕에 말리고

마디마디 단초를 캐내며

마지막 남겨진 세간 순지로 옮긴다

 

얽죽얽죽 씌어지는 자서에

순지는 소지가 되었다

"굳세게 살어라"라는 골자가

아른거린다

 

자밤자밤 다시 쓰는 유서를

나는 모두 읽어낼 수 없다

톡톡 털어내니 난분분 흩어지는 흙문자

말에 얽히지 말고 차라리 까막눈 되라는

골필 유훈은 읽었으나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전해지던

육계의 숨결이 후끈거려서

 

그리하여

겨우 눈물 몇 방울 소지에 보태

활활 하늘로 돌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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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길 1967년 경기도 이천 출생. 2011년 시집 『도배일기』를 출간하며 등단.

 

 

 




『현대문학』 2013년 2월호(158~159쪽)에서 보았습니다.


"죽으면 사십구제까지는 잘 지내줄게."  병원에서 나와 피차 정신을 좀 차리게 되었을 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사십구제라…… 거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는 길이 되겠구나.'
죽으면 그만이겠지만 '鬼神百科' 같은 데 나오는 그 길이라면 얼마나 아득한 길이겠습니까.  그 길을 혼자서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어서 이 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편한데, 생각만 하면 구체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일들로 아득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