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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한 아이를 바라보기

by 답설재 2016. 3. 15.

 

출처 : 한겨레, 2016.2.3. 2면 「트럼프 인기 거품이었나…크루즈, 개막전 뜻밖의 승리」

 

 

 

오래 전의 일입니다.

교장실 창문으로 운동장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2학년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트랙을 달리고 있는데 넘어져 있는 아이가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그냥 달리고 있었습니다.

 

얼른 그 아이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손을 잡아 부축하거나 안고 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 아이를 한번 업어보고 싶었습니다. 등을 대고 앉았더니 순순히 업혀 주었고 우리는 무엇인가 얘기하며 보건실로 갔습니다.

(고추도 한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건 결례여서 그냥 등에 전해오는 감촉만으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절대 비밀!)

 

 

 

 

나중에 그 선생님께 물었더니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맞겠더라고 했습니다.

나는 선생님과 생각이 다르다고 얘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넘어진 아이를 보살필 동안 아이들의 달리기가 혼란스러워질 것은 당연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했고, 그 아이들은 '나도 넘어지면 걱정해 주시겠지' 하고 선생님 마음을 생각할 것이라고 덧붙였는데 그 선생님은 내 생각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넘어진 아이를 보살펴주시는 것은, 엄마나 아빠가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엎드려 있지 말고 당장 일어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얘기도 했고, 주제넘다고 할까봐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는 하느님을 믿으시니까" 하고 전제한 다음 '성서의 한 마리 길 잃은 양' 이야기에서 나머지 양들이 개판을 쳤다는 얘기는 있을 수 없고 어쩌면 그게 교육이 아니겠느냐고도 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나로서는 참으로 섭섭했지만 그 선생님은 끝내 내 이야기에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교사들 중에는 어쨌든 교장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으려는 습성이 몸에 벤 경우가 있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한순간에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건 교육적인 내 신념에 따른 판단이라는 얘기를 덧붙이고 말았습니다.

 

 

 

 

도시에는 학생이 천 명이 넘는 학교가 많습니다.

나도 41년이나 교육을 해본 사람이지만 학생 수가 많아야 혹은 어느 정도는 돼야 성적이 오르고 교육도 제대로 된다는 말은 도무지 어떤 논리로 하는 얘기인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큰 학교 교장은 정치인들처럼―저 위의 저 사진을 보십시오― '눈 따로 손 따로'일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학교 교장이라도 한꺼번에 한 명씩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아이를 바라보는 그 교장의 눈에 사랑이 깃들어 있다면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라도 얼마든지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학교 교장이 정치인들처럼 '눈 따로 손 따로'이면 그는 틀림없이 가짜 교장입니다.

 

아! 교장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어집니다.

이제 대안학교 교장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돈은 없고 있는 건 생각뿐입니다. 부모가 없는 초등학생도 가르쳐볼 만하고, 특히 고등학교 단계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가르쳐 보고 싶었는데 그만 포기해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이따위 어쭙잖은 블로그는 하지 않아도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