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꼴찌, 힘내!

by 답설재 2015. 12. 23.

 

 

초등학교 교사 K가 전화를 했습니다. 2015년 12월 현재, 초등학교 2학년인 자신의 아들도 꼴찌고, 자신이 가르치는 반 아이들도 꼴찌라고 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성적표에 지필고사의 학년별 평균점수를 나타내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그걸 보면 자녀의 상태를 당장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데도 학년 평균보다 별로 좋지 않다면 그건 알아보나마나가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시험지를 가정에 보내주지는 않지만, 학부모들에게 자녀의 지필고사 점수만은 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는 교장실에서 모눈종이에 그려진 두 가지 그래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정기 학력고사 학급별 평균을 나타낸 막대그래프와 학급별 저축 실적 그래프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그래프도 더 그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가르쳐봐도 우리 반 막대는 늘 키가 작았습니다. 그것도 수업이라고 교탁 위에 '"전과'를 펴놓고 그걸 칠판에 베껴주는 선배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교실은 교사도 아이들도 편안하기만 했고, 막대그래프는 늘 높이 솟았습니다. 분통이 터지고 한탄스러워 하면 그 선배들은 씨익 웃기만 했습니다.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세 가지는?"(정답 : 의·식·주)

"옷, 음식, 집, 그런 건 몰라도 좋고, 구태여 '의=옷, 식=음식, 주=집' 그렇게 짝을 지어 외울 것도 없고, '의식주' 그대로 외워서 ( ) 세 개에 하나씩 써넣을 것! 자, 5분간 외워 봐. 의식주, 의식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에서는 굳이 "믿음, 사랑, 소망"이라고 쓴 아이도 나왔고, "어머니, 선생님, 책"이라고 쓰고 ( )가 하나만 더 있으면 "아버지"도 써넣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한 차시 수업 시간의 마지막 5분만 할애해도 시험에 날 만한 그런 것들을 잘 암기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알량한 자존심은 그걸 용납하지도 않았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는 교육이 할 일이라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1

 

삶은 진실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런 추한 모습대로가 아니다 : 당신이 모든 것들―종교 조직, 전통, 지금의 부패한 사회 등등―에 저항하고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그 참모습을 알아낸다면, 그것의 깊이, 풍요로움, 그 놀라운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모방하지 않고, 스스로 발견하는 일―그것이 교육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의 사회, 또는 당신의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이 하라는 대로 틀에 짜맞추어지기는 쉬운 일이다. 안전하고 쉽게 사는 방법이 그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두려움과 부패, 그리고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산다고 함은 무엇이 진실인지 스스로가 알아내는 일이며, 당신 안에서 끊임없는 내적 혁명이 일어날 때, 그리고 자유가 있을 때에만 스스로 알 수 있다.

 

 

 

 

아직도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 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아이들과 교사들을 묶어 놓을 수 있다면 예전의 그 그래프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필고사 성적이 성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이미 덜통이 났고, 그래서 초등학교에서만이라도 지필고사 위주의 평가를 하지도 말고, 성적표에도 그런 점수를 기입하지도 말라고 한 지가 옛날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우리가 언제 개인별 지필고사 성적을 기록해 보냈느냐?"고 항변할 것입니다. 어쭙잖은 사교육 업체에서나 할 일을 그렇게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럴려면 "인성교육진흥법"은 왜 만들었겠습니까? 그건 그것대로 또 다른 주요 업무만 늘이는 꼴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법이 본래의 쥐지를 구현해 나갈지 걱정스럽습니다.

 

 

 

 

바꾸려면 다 바꾸어야 합니다.

초등학교니까 바꾸고, 고등학교는 입시 때문에 바꾸지 않고, 중학교는 곧 고등학교에 갈 아이들을 가르치니까 유보하고, 그렇게 해서는 바뀌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대학교 입시 때문에 바꿀 수 없고, 대학교 입시 때문에 유치한 경쟁을 시켜야 하고, 대학교 입시 때문에 주입식, 지필고사, 5지 선다형 문제풀이, 정답 맞추기에 힘쓰고, 그렇게 하다가 대학에 가서도 질문 같은 건 하지도 말고 설명을 잘 듣기나 하기, 다른 생각이나 창의적인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고 교수가 강의한 대로, 농담한 것까지 다 적어 놓았다가 시험지에 그대로 쓰기……

이렇게 해서는 "정말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쟁을 시키지 않고 교육이 될는지 의문일 것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 대답도 내놓았습니다. 공부(교육)도 우리의 삶의 모습, 그 모습 그대로 하면 된다는 걸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교육이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학교만이라도 '천국' 같다고 해서 안 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질문 : 사회가 욕심과 소유욕에 바탕을 둔 것이 사실입니까 : 욕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부패하지 않을까요?

 

크리슈나무르티 :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답을 얻기 위해서는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중략)… 당신과 당신이 원하는 것을 똑같이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있습니다 : 이러한 갈등이 창조적인 삶을 만들어냅니까? 이해할 만합니까, 아니면 너무 어렵습니까? 어떤 일을 그냥 좋아서 할 때 당신은 욕심을 가집니까? 당신이 전 존재를 기울여 무엇을 할 때, 어디에 이르려고 해서가 아니고, 이익을 더 내기 위해서나 큰 결과를 바라서가 아닌, 그냥 그게 좋아서 할 때, 거기엔 욕심이 없습니다. 있습니까? 그곳엔 경쟁이 없습니다 : 일등을 하려고 누구와 다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이 할 일은, 당신 인생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당신이 가치있다고 느끼고, 의의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종사하게 하기 위하여, 정말로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알아내도록 돕는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남은 세월 동안 비참하게 지낼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당신의 마음이 권태, 부패, 죽음만이 있는 일생의 쳇바퀴로 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 젊은 시절에, 당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 이러한 길로써만 새 사회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2

 

 

 

 

 

 

 

...................................................................

1.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이병기 옮김, 『삶의 진실에 대하여』 「교육이 할 일」(까치, 초판 1982, 1990; 7판), 13쪽. 이 책은 1980년대 초에 크리슈나무르티가 인도에서 행한 강연 내용을 엮은 것으로, 이 번역본의 텍스트는 'Think on These Things'(Haper & Row, 1970)이고 영국에서는 'These Matter of Culture'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바 있답니다.
2. 17~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