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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선생님께-'목사 아버지의 손에 미라가 된 14세 소녀'

by 답설재 2016. 2. 5.

 

 

선생님!

지난달에는 부모에게 살해된 한 초등학생 시신이 훼손된 채 4년 가까이 냉장고에 들어 있었던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이번에 또 충격적인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한 여중생이 사망한 지 11개월 만에 부패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딸을 두들겨 패서 죽여버린 아버지는 교회 담임목사이고 신학대학교의 존경받는 겸임교수랍니다.

이 신문 저 신문 눈에 띄는 대로 읽어보았습니다(2016.2.4).

 

- 13세 딸 시신… 미라 될 때까지 집에 둔 獨 유학파 목사(조선일보)

- 결석 1년… 13세 소녀의 죽음, 또 아무도 몰랐다(동아일보)

- 목사 아버지 손에 미라가 된 14살 소녀(한겨레)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 중에도 목사답지 못한 사람이 있다."

"교수 중에도 교수답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박사 중에도 박사답지 못한 사람이 있다."

"목사, 교수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다. 어느 집단이든 그 속에는 일부 나쁜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말해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말합니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지난번에 「아이들의 눈을 보라」는 글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발 아이들의 눈 좀 들여다보라!"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하고 아주 어려운 것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제발 아이들의 눈 좀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바로잡히고, 더러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정신을 차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들여다보자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자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필요한) 교육'입니다.

지식을 설명하는 것쯤은 우리가 할 일의 순위에서 도대체 몇 번째여야 할지, 좀 심하게 말하면 그걸 순위에 넣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학교가 입시 대비 사설학원처럼 그런 일에만 주력하면서 학교와 교사의 권위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설학원만큼 설명도 잘 해주지 못하고 권위만 세우려는 걸 누가 좋게 보고 싶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 권위를 높여주어야 하겠습니까?

 

 

 

 

선생님!

그렇지만 저는 학교와 선생님들의 그 권위가 곧 회복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신문들은 그걸 알아차리고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양은 숨지기 이틀 전인 작년 3월 15일 가출했고, 16일에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교사를 찾아갔다. 이때 담임교사는 이양을 달래 아버지 이씨에게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계된 지 하루 만에 숨졌다.

● A양은 본보에 "그 친구가 지난해 3월 사망하기 전 마지막 가출했을 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이유도 갈 데가 딱히 없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 숨진 이양 역시 가출을 했다가 옛 초등학교 교사의 손에 이끌려 가정으로 돌아갔지만, 가출 이유를 물으며 5시간 넘게 이어진 아버지의 폭행으로 참변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생님 곁에는 지금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들도 많지만, 헤어진 부모의 정을 그리워하는, 혹은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부모를 그리워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정에 굶주리는 아이들은, 지식을 갈구하는 목마름으로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깊은 눈길, 따스한 손길이 스치는 그 순간을 위해 학교에 오고, 이 사회에서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도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저 이양은 초등학교 때의 그 선생님, 선생님의 눈길과 따스했던 손길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믿으며 아버지에게 인계되었을 것입니다.

혹 이양은 자신을 아버지에게 인계하신 선생님을 원망하고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녀는 저승에서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 목사가 아니라 그 선생님뿐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그런 경우에 아이들이 찾아갈 사람은 선생님뿐입니다.

또 그 그리움은 이양에게만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벼랑에 서 있든 그렇지 않든,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평탄하든 그렇지 않든, 심지어 선생님께 연락을 하든 그렇게 하지 않든, 선생님을 스쳐간 수많은 그 아이들은 노인이 되어서도 선생님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학교는 지식을 전해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육부나 교육청에서도 그것이 진정한 교육혁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선생님께 다른 그 어떤 일보다도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말을 듣는 일에 힘써 달라는 부탁부터 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그날이 올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동아일보, 2016.2.4. A12. 마지막 야누스? 마지막 '야누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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