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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매일 다섯 가지 과일을!"

by 답설재 2015. 10. 30.

 

 

 

 

 

"매일 다섯 가지 과일을!"

 

 

 

 

 

 

 

 

 

 

 

 

  블로그 《삶의 재미》(주인장 : 노루)에서 가져온 어느 초등학교 교정 사진입니다.

                                               《삶의 재미》 바로가기 http://blog.daum.net/dslee/717

 

 

 

  잘은 모르지만, 여기 초중등학교의 분위기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 누구도 그렇게 긴장하는 것 같지 않아 보여요. 우리 애들 둘도 다녔던 여기 중학교의 전광판을 차 타고 지나가다 보니 한동안은 "매일 다섯 가지 과일을 먹읍시다" 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이 설명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충격적'…… 그만큼의 충격은 나로서는 두 번째였습니다.

 

 

 

 

  몇 년 전, 뉴질랜드의 어느 초중학교1 교장이 방한한 길에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귀교의 교육목표는 뭔가요?" 하고 덕담삼아 물었더니 난처해하며 "그런 건 없다"고 하다가 내가 "1. 주체성이 확립된 어린이, 2. 마음과 몸이 건강한 어린이……" 어떻고 하며 우리 학교의 교육목표를 대충 소개하고 "이런 게 있을 것 아니냐?"는 식으로 또 물었더니 "그런 것이라면……" 하며, 혹은 무슨 면접시험에 나온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대답했습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음, 그렇게 가르쳐 아이들이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게 하고…… 음, 그렇게 해서 수업의 수준을 높여나가는 것이 나의 방침입니다."

 

  그는 그렇게 더듬거렸지만, 나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하! 공부 가르치는 걸 이야기하는구나. 그래, 학교는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지. 그런 걸 목표로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우리 학교에서 내걸고 있는 교육목표가 갑자기 좀 색바랜 느낌을 주는 것 같았고, 어쩐지 야단스럽기만 하고 유용성은 떨어지는 것 같았고, 그러니까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미안한 것 같았고, 아무래도 고치든지 아예 없애든지 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은 조바심을 느꼈고('그렇지만 교육장이 무슨 학교교육목표도 없는 학교가 있느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내가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온 것이 쑥스럽기도 했습니다.

 

  "매일 다섯 가지 과일을 먹읍시다."

 

  지금 우리 동네 학교의 전광판에는 무엇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Ⅳ

 

 

  웬 사람이 나타나서 "전광판에 뭐라고 씌여 있는지 좀 보고 싶다"고 하면 그걸 핑계로 무슨 짓을 할는지 나 같아도 의심스러워 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지나오며 교문 주변이나 살펴봤습니다.

 

  여러 관청에서 합동으로 내 건 현수막이 보입니다. "학교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면 아이들이 아파요!"

  합동으로 내 건 다른 현수막도 있습니다. "어린이 보호 구역 SCHOOL ZONE, 30km, 여기부터 속도를 줄이시오."

  다음은 행정기관과 학교, 관련 업체 등에서 내 건 표지판들입니다.

 

  • GREEN FOOD ZONE, 여기서부터는 어린이 식품안전보호구역입니다.(금연구역 SMOKE FREE ZONE도 함께 표시됨.)

  • 금연구역

  • (위와 다른) 금연 안내("금연표시가 없어도 금연은 기본입니다" 등의 자세한 내용)

  • 정문 개방 안내문

  • 시설물 개방 안내

  • CCTV 설치 안내

  • 청소년 지킴이

  • 에스원 SECOM

  • 학교 환경위생 정화구역 안내

  • 염화칼슘 보관하는 집

  • "잠깐만!!"(폐기물 무단투기에 대한 경고)

  • 학교폭력근절 안내문("마음 놓고 학교 다니기", "범죄예방 경찰은 3분 거리에" 등의 내용)

  • 안전한 도로 횡단 5원칙

  • 동사무소 지정 크린하우스

  • "기본이 바로 된 어린이" 교육청 지정 모범실천학교

  • 한국지역사회학교협의회 표지판

 

  얼핏 들여다봤더니 건물 벽에 뭐라고 크게 적혀 있는 것도 보입니다. HAPPY, 창의적인 어린이, 연구하며 가르치는 선생님, 봉사하는 학부모……

 

 

 

 

  써 붙여야 한다면 써 붙여야 할 것입니다.

  "매일 다섯 가지 과일을 먹읍시다." 사실은, 그게 그렇게 부러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도 앞으로는 덜 긴장하고, 덜 복잡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른 그런 사회, 일일이 써 붙이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1. 오클랜드 와카랑가 스쿨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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