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에 빠져 있었던 시절에는 모든 게 달랐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 "지금 네가 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직업이야."라고 누누이 혼자 중얼거렸고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할머니를 다정하게 포옹했고 이 동네도 정말 평화롭고 살기 좋은 아늑한 곳이라고 믿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도살장에서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거기에서 일을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녀는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그녀가 격주로 금요일마다 현장학습을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오는 바람에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도살장에서는 요일별로 모든 연령대의 방문객을 받았다. 그녀가 데리고 오는 가장 어린 연령층의 방문객은 주로 동물 구경을 하고 암소는 "음메" 하고 울고 양은 "메"하고 운다는 등, 주로 그런 것들을 배우러 온다. 보다 머리가 큰 아이들은 주로 기술적인 것들을 궁금해 한다. 자동장치들,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기계, 흔들거리고 움직이는 전기, 수압, 공기압력을 이용한 장치들 같은 것에 흥미를 느낀다. 조만간 우리 처지에 처할 법한 또래의 연령층은 보다 구체적인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들은 거리낌이 없었고 모든 것을 아주 자세히 알고 파고들고자 했다. 그들은 긴 질문 목록을 가지고 나타났다. 메모를 끄적거리는 것을 봐서 나중에 발표도 할 모양이었다. "마취는 어떤 식으로 하지요? 피는 어떻게 뽑아내는지? 내장 제거는? 열탕식 털 뽑기는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힘줄제거기는 어떻게 쓰는 건지?" 그들은 시범을 보여주길 원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한 시간에 몇 마리나 죽일 수 있나요? 하루 몇 시간 근무하는지요? 그리고 이것저것 다 합하면 얼마나 버나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며 나는 "도무지 젊은 애들은 없네!" 라고 중얼거렸다.
Ⅰ
프랑스 소설 『도살장 사람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조만간 우리 처지에 처할 법한 또래의 연령층"이라니까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현장학습을 온다는 내용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음메" 하고 우는 짐승과 "메" 하고 우는 짐승에 관심을 가지지만, '조만간 우리 처지에 처할 법한 또래의 연령층'인 학생들은 아주 진지합니다. "마취는 어떤 식으로 하는지?" "몇 시간 근무하는지?" "얼마나 버는지?"……
Ⅱ
글쎄요. 우리 같으면 당장 이러지 않을까요? "도살장엔 왜? 내 아들을 뭘로 보고?" 아니, 도살장 현장학습이 필요하기나 할까요? "수능시험에 도살장이 출제되나?" "장차 도살장에 근무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기에?"……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교과서에 담고,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습니다. 교육목표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잘 간추려진 수많은 사실들의 요약을 거침없이 설명하고 암기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저 소설속의 프랑스 학생들은 도살장에서 '도살'을 배우는 게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살아가는' 힘을 배웁니다. 그런 힘은 고급스러운 박물관 견학이나 수준 높은 강의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지만 푸줏간에서도 얼마든지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만 보면 다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 두고두고 방문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Ⅲ
교육부에서는 지난 8일, 내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중학교 자유학기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자유학기제란, 중학교 1학년 1학기, 혹은 2학기, 2학년 1학기 중 한 학기를 정해서 오전에는 참여·활동 중심으로 교실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학생들의 희망을 들어 진로 탐색 활동, 주제 선택 활동, 예술·체육 활동,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학습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시책이 성공적으로 실현되어 학생들이 즐거움 속에서 보람있는 한 학기를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문에 난 것처럼 이 기간이 "남보다 먼저 진도 나가기"의 기회로 삼는 사교육에 점령되어 '자유학기제'가 학생들을 더 어렵게 하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Ⅳ
이 시책이 성공적으로 실현되기 위한 열쇠가 있습니다.
먼저, 자유학기제를 통해 가르치고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부터 해야 합니다. 우선 한 학기라도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야 이 시책이 아이들을 오히려 더 힘들게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학교를 믿고 완전히 학교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취지를 취지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워야 할 내용은 모두 교과서에 들어 있으므로 다른 건 다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여기니까 우리에겐 이런 시책의 실현이 어렵고 부작용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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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엘 에글포프 지음, 이재룡 옮김, 안규철 그림,『도살장 사람들』(현대문학), 2009), 89~92쪽.
** 이것은 학생들이 시험 부담에서 벗어나 행복한 학교 생활 속에서 자신의 '꿈과 끼'를 찾고, 창의성·인성·자기 주도 학습 능력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핵심 역량을 기를 것을 목적으로, 현 정부에서 처음 도입하는 시책입니다(교육부 관련 보도자료 참조).
*** 이런 건 말도 꺼내기 싫지만, '봉사활동' 생각이 납니다. 교과 성적에만 치중하는 인간보다 봉사 활동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봉사활동 기록을 대학입학전형에 반영하겠다고 하니까(그 당시 우리 교포 여학생이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는데도 하버드대 입시에서 탈락했고, 대학측에서는 봉사활동 실적이 전혀 없는 것이 탈락 이유라고 발혔다는 기사가 J일보에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학생은 학원에 보내고 부모가 대신 봉사활동을 하고 봉사활동 실적 증명서를 자녀 이름으로 발급해 달라고 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부 기관에서 잘못한 점도 있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무슨 조사를 인터넷으로 하면서 부모를 도와 입력해 주는 학생에게 2시간의 봉사활동을 인정해 주겠다고 한 사례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부모를 도와준 것이, 말하자면 제 일 제가 한 것이 무슨 봉사가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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