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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김정욱 교수의 '내가 본 한국 교육' (Ⅱ)

by 답설재 2014. 12. 31.

 

 

 

 

나는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 어느 날, 버스에서 하차하려고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대려는 순간 내 뒤에 서 있던 사람이 내 어깨 너머로 손을 내밀어 나보다 먼저 카드를 찍었다. 뒤돌아보았더니 고등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었다. 나보다 먼저 찍었다고 나보다 빨리 내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의아했지만, 곧 그 일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비슷한 나이의 학생이었다. 두 학생은 과연 왜 그랬을까? 나는 행동이 그렇게 느린 사람도 아니다. 설혹 늦다고 치자. 카드를 내 어깨 너머로 내밀어 먼저 찍는 심리는 어떤 것일까? 요즈음 학생들은 무엇인가에 쫓기며 산다는 증거가 아닐까? 마음은 바쁜데 일은 마음대로 안 된다. '우선 찍어나 보자'는 심사다. 그래야 내려갈 때 마음 놓고 빨리 내릴 수 있기 때문인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실례가 된다는 것은 생각해볼 여유가 없다. 무슨 일이든 빨리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빨리 해야만 하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당연히 대학입시를 위한 수능시험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 내에 많은 문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 단 한두 문제가 입학하는 대학의 순위를 바꾼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 대학의 순위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빨리,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해야 하는 습성을 평소에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드도 먼저 찍는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바로 한국 사람들의 "빨리 빨리"의 원인이 아닐까?(80이 넘은 어른들은 그렇게 빠르지 않다. 그렇다면 "세 살 적 버릇은 팔십까지만 간다"로 고쳐야 하나?) 내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고등학생은 밤늦게 전철이나 버스에서 무거운 가방을 매고 몹시 지친 모습으로 꾸벅거리는 학생들이다. 학원에서 문제를 빨리 푸는 요령을 익히고 집으로 가는 길이겠지. 오늘하루 과연 운동은 했을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하기나 했을까, 그리고 푸른 하늘을 한번 쳐다보기라도 했을까? 걱정이다.

 

과연 이렇게 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나? 요즘 언론은 매일같이 야단법석이다. 대학입시에 관한 별별 이야기가 톱기사가 된다. 다른 나라에서 살 때는 이런 이야기가 톱기사가 되는 걸 본 적이 없다. 왜 모든 학생이 일류대학에 들어가야만 하는가? 서울대학이라는 간판이 그렇게 중요한가? 어느 나라에나 명문대학들은 있다. 미국의 하버드대, 일본의 동경대, 프랑스의 그랑제콜(Grands Ecoles), 영국의 옥스퍼드대…… 소수의 학생들은 이런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야단법석들을 하지만 한국처럼 심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많은 학생들이 일류대학에 들어가려고 한다. 모두가 장미꽃이 되려고 한다. 사실 수능점수만 본다면, 열심히만 하면 이류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370점에서 소위 명문대 입학 점수인 390점으로 올리는 것은 가능하게 보이지만 현재의 제도에서 거의 모든 학생이 어렸을 때부터 고도의 기술을 가진 '시험 치르는 기계'가 되는 훈련만을 받아왔기 때문에 한두 문제가 당락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마치 창의력이 방해가 되는 양 미친 듯이 달려간다. 왜 학생들에게 가끔은 낭만과 꿈도 꾸고, 지적 방황도 하고, 운동도 하는 자유를 누리는 기회를 주지 않는가? 남이 그럴 시간에 나는 한 문제라도 더 풀어보려고 하는 한국형 돌연변이의 DNA 때문인가?

 

한두 문제로써 일류대 입학의 당락을 좌우하는 나라는 한국뿐일 것 같다.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돼 있다. 한국의 이런 점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미국의 하버드대는 SAT 만점이라 하더라도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이 많고 만점이 아닌데도 들어가는 학생도 많다. 인생은 1, 2점의 점수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SAT 점수는 중요한 참고자료의 한 가지로 삼을 뿐이다. 이렇게 하려면 정량적인 판단 이외의 판단, 즉 면접, 학교 성적(미국도 고등학교 서열은 금지) 등의 심사 비중이 확대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EBS 방송 강의에서 수능 문제의 70%를 출제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정책은 사교육을 억제하겠다는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암기력만 있으면 수능점수의 70%는 따놓은 게 아닌가? 나머지 30%로 서열을 가리겠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몇 점 차이로 명문 대학의 당락이 결정되는 것은 당연하게 된다. 이 30%의 문제도 과연 창의력을 테스트하는 것인지, 학생들을 혼돈되게 하여 점수 차가 나게 하는 것이 아닌지, 아니면 얼마나 좋은 사설학원에 다녔느냐를 테스트하는 것은 아닌지, 우선 수능시험의 의도와 철학부터 궁금해진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된 사람들을 '고졸'이라고들 한다. 대학을 다닐 때는 고시 준비하느라 강의는 거의 빠지고 졸업하기 때문이다. 아주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합격 이전의 '간판'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나도 서울대를 졸업했으나 이런 의미에서는 '고졸'이다. 6.25전쟁 직후에 입학해서 대학이 대학 역할을 할 때가 아니어서 제대로 된 강의는 별로 없었고, 영어나 일본어로 된 교과서들을 동급생들과 함께 공부했던 것이다. '간판'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위 간판일 수도 있는데 왜 명문 대학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큰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서울대 졸업이라는 '간판'의 덕을 본 사람일까? 그것도 전교 수석 졸업이라는 간판이다. 졸업 후 1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갔다. (당시에는 외국 유학하는 사람들은 1년의 군 복무 후 '귀휴'라는 명분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처음에 다닌 대학은 인디아나(Indiana) 주의 사우스벤드(South Bend) 시에 있는 노트르담(Notre Dame)대학이다. 그 연유는 이렇다. 군 복무하던 중 여러 동기생들이 함께 모교에 들러 당시 미국 미시간(Michigan)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신 선배 교수님의 자문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특히 이 노트르담대학에 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셨다. 큰 명문 대학에 가면 교수와 대화할 기회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불친절해서 좋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고, 그 교수님이 미시간대에 계실 때 가까웠든 동료가 노트르담대학 교수로 가 있기 때문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도 했다. 그때까지 나는 '노트르담의 꼽추'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대학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대학이야 서울대 전교 수석이라는 간판이 없어도 충분히 갈 수 있는 대학이었다. 3명의 내 동기들은 모두 작은 대학에 가라는 우리 교수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버드, 프린스턴, 일리노이 대학에 들어갔다. 어떻게 됐을까? 나는 개인 사정으로 1년 후 같은 인디아나주에 있는 인디아나(Indiana)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를 받은 후 펜실베이니아 (Pennsylvania)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메릴랜드(Maryland) 주에 있는 존스홉킨스(Johns Hopkins)대학 물리천문학과의 교수로 부임하여 30여년을 근무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함께 유학을 떠나 명문대에 들어간 그 동기생들도 모두 처음에 들어간 각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학문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간판'이라는 것이, 그것도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의 간판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사람이면 다 잘 아는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이휘소 박사는 한국이 낳은 가장 유명하고 세계적인 소립자 물리학자였으나 불행히도 197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에 나오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핵폭탄 개발 등에 전혀 관여한 사실이 없는 순수 이론물리학자다. 그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이휘소 박사를 모독하는 내용이 많아 안타까웠다. 이휘소 박사는 6.25전쟁 당시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후 미군 장교 클럽의 도움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 대학은 오하이오(Ohio) 주에 있는 조그마한 마이애미(Miami)대학이었다. 이 대학을 잘 아는 한국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휘소 박사도 서울대학교 간판이 필요 없었던 경우다. 학부를 마친 후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피츠버그(Pittsburg)대학으로 옮겨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천재적인 재질이 인정되어 그 대학에서 바로 조교수로 채용됐다. 그때가 바로 내가 그 대학에 연구원으로 갔을 때였다. 3년 후 나는 존스홉킨스대학으로 떠나고 이휘소 박사는 스토니부룩(Stony Brook) 뉴욕 주립대학으로 갔다. 그는 몇 년 후 페르미연구소의 이론학부 부장이 됐으며 물리학에 큰 공헌을 했다. 아무튼 대학 간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일류대학의 박사학위라 하더라도 그렇다. 이런 것들은 인생의 성공에 있어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간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재미있는 실화가 있다. 딸이 셋인 어느 명문대 교수의 이야기다. 몇 년 전, 그는 대전에 설립된 어느 연구소의 한 연구단 단장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들인 딸 셋은, 역시 그가 연구단 단장으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아빠! 우리들 모두 곧 결혼해야 하는데 지금 아빠가 나가시는 대학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 좋은데, 그 연구소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우리가 일일이 다 설명할 수가 없잖아요." 물론 그 교수는 연구소로 갔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는 결혼 조건을 위해서 신부 아버지의 명문대 간판도 필요한 것 아닌지 다분히 의심이 간다.

 

우리나라의 명문대 중에 전국의 과학고 학생들이 가장 많이 가는 대학이 있다. 이른바 '영재들'은 과학고에 들어가기 위해 초·중학교에서 모두 공부를 잘한 학생들이다. 적어도 빠른 시간 내에, 틀리지 않고 문제를 잘 푸는 학생들임은 분명하다. 그들 중에는 공부 이외에 다른 재주도 가지고 있고, 운동도 많이 해서 건강하고, 사회생활의 지혜도 많이 쌓은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 오직 공부만 하고(즉 '시험을 잘 보는 기계'), 삶의 지혜는 갖추지 못한 학생들이라면 그들은 과연 과학자로 성공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내 사무실에 물리학부의 한 연구원이 찾아왔다. 명문대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한 우수한 연구원이었다. 그는 갑자기 우주의 근본원리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겠다고 했다. 우주의 근본원리, 즉 우주는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진화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돼서 연구하는 것보다 연구소에서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잘 타일러 보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후,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나에게 말한 그 이유를 가족에게도 이야기했고, 당연히 심한 충돌이 있었으며, 불행히도 가족은 강제로 그를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그날 밤, 이 연구원은 병원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후에 그의 옛 동료를 통해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얼마 전, 이 연구원은 처음으로 여자친구와 사귀는 사이가 되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난생 처음 겪는 패배감에 우선 속세를 떠나 절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었으나 가족의 극렬한 반대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우리 사회와 가정의 잘못된 교육풍토가 낳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온실과 같은 환경에서 좋은 대학만 나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며 학생들을 채찍질하는 사회도 그렇지만, 부모의 잘못도 큰 것은 물론이다.

 

 

누리과정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린다. 성장 과정으로 볼 때는 상당히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요한 개성이 형성되고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이 과정이 마라톤 코스와 같다. 누구나 1등을 할 것 같이 시작하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고등학교 때는 '달리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 마라톤 코스에는 얼마나 아름답고 신기한 자연과 환경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달리기만 하는 것이다. 선생과 부모들은 이런 것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한다. 경주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우승 상패가 중요하니까……. 그러나 그 다음에 전개되는 삶에서는 그 상패는 아무 소용이 없는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고집한다. 그렇게 지쳐서 도착한 대학과 사회에서 과연 제대로 또다시 경쟁하고 이겨낼 수 있을까? 대학과 사회에서는 여유 있고 지혜롭게 지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마라톤 코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마라톤 코스에서 이미 너무 지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대학에 가서 드디어 공부다운 공부를 시작하고, 대학원에 가서는 더욱 그렇다. 제발 간판위주보다 실력위주로, 빨리 빨리보다 알차고 성실하게 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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