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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멋진 현수막

by 답설재 2015. 7. 17.

 

 

 

 

 

K대 대학원 촉탁강사로 「교재연구개발론」 강의를 했습니다.

일반대학원이어서 수준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고, "한국 학생들은 질문을 할 줄 모르고, 토론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걸 누누히 듣고 있었습니다.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열여덟 명 중 대부분이 교육과정 전공 박사과정이었고, 나머지가 석사과정이었는데, 질문도 많이 하고, 이야기도 잘 듣고, 토론도 진지해서 강의는 늘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다행인 것은, 꼭 결론을 내야 할 주제는 거의 없어서 강사로서의 역할은 겨우 다음에 더 이야기하자고 만류를 한 것뿐이었습니다. 어쨌든 한국 학생들은 질문도 못하고 토론도 못한다고 비난하는 교수들은 K대학 대학원에 한번 가보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 중 삼분의 이가 현장교사들이어서인지 이야기하는 내용이 그들에게 잘 수용되는 것 같았습니다.

 

무언가를 설명하다가 현수막 이야기를 했는데, 초등학교 교사인 어느 수강생이 당장 실천한 결과를 보여준 것이 위의 사진에서 본 저 현수막입니다.

 

 

 

 

현직에 있을 때 쓴 글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공문은 플래카드(현수막)를 '불조심 강조의 달'로 할 경우, "2008.11.1~11.30, 2008. 불조심 강조의 달, ○○빌딩"을 석 줄로 배치하고, '방화 환경 조성용'으로 할 경우, "2008.11.1~2009.3.31, 화재!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주)○○회사"를 역시 석 줄로 배치할 수 있다는 제작 안까지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또 플래카드 사용 문안 열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 설마하면 큰일날불 조심하면 안전한불

◦ 크고작은 화재사고 알고보니 순간방심

◦ 잘못쓰면 성난 불길 바로쓰면 웃는 불씨

◦ 살핀만큼 안전한불 잊은만큼 위험한불

◦ 행복한 우리가정 알고보니 불조심

◦ 이게설마 큰불될까 그게정말 큰불된다

◦ 우리가족 소방가족 안전한 우리생명

◦ 버릴 것은 설마의식 가꿀 것은 소방의식

◦ 설마한날 화재 있고 조심한날 화재없다

◦ 지켜보면 꺼질불도 돌아서면 살아난다

◦ 이게설마 큰불될까 그게정말 큰불된다(중복 제시)

◦ 화재발생 무서워요 화재예방 참좋아요

◦ 소화전은 어디에? 소화기는 어떻게?

 

다 짐작하시겠지만, 공문은 자세하고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키는 대로' 하면 다 될 것입니다. 각 학교, 기관, 업체, 회사, 빌딩 등 여러 곳에서 그대로 실천하면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는 '불조심' 매뉴얼이니까요. (…)

 

 

 

 

우리가 불을 가지고 장난치면 불은 세상을 망쳐요 (2, 허태훈)

 

위의 글에서 덧붙여 보여준 표어입니다. 겨우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지은 이 표어로 멋진 현수막을 만들어 내걸었더니 온 학생, 학부모, 교직원들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고, "우리는 우리 학교의 모든 교육을 이런 눈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썼습니다.

 

이 글의 내용을 소개했더니, 그 대학원 수강생 중에 저렇게 당장 실천해본 선생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저 현수막 하나가 중요하고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학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 가르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면 아이들이 생각하고 활동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저런 현수막 하나도 스스로 만들어 내걸 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면, 그런 학교는 차라리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누누히 말하지만, 현수막만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저 현수막 만들어 내걸듯이 해야 합니다.

 

학교 다니는 걸로 모자라 학원 다니고, 달달 외워서 문제집 풀고 해서 대학, 대학원 다니고 석사, 박사 학위 받고 해서 출세한 사람들(주로 교육행정가)이 이런 걸 좋아할까요?

이해나 할까요?

 

"진도 나가야 하는데, 방송 듣고, 문제집 풀고, 대학 가야 하는데, 출세해야 하는데 현수막은 무슨, 쓸데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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