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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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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 공부 Ⅰ

by 답설재 2016. 2. 16.

이우환1 공부 Ⅰ

― 『현대문학』 2016년 1월호(326~340), 「이우환과의 대화」(서면 인터뷰) 발췌 ―

 

 

 

 

Art Daily 블로그에서 캡쳐한 사진

 

 

 

Q. 이우환 선생님의 약력에 따르면 한국의 전통 서당 교육문화의 마지막 세대를 경험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교육문화가 어떤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 독자들이 당시의 생활을 상상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미셀 앙리시2)

 

A. (……) 어머니의 사랑과 예민한 감성이 없었다면 내가 예술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고달픈 노동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을 내어 옷을 갈아입고 반듯이 앉아 고전소설이며 시를 읽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운 문학소녀 같으면서도 고귀하고 준엄했습니다. 특히 문장을 독특한 리듬으로 소리 내어 읽는 어머니의 예쁜 목소리는 지금도 귓전에 아련합니다. 문장뿐 아니라 모든 표현은 뜻보다 모양새와 리듬이 중요하고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는 나의 환상은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대여섯 살 때 윗 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닌 적이 있는데 중국의 고전인 『소학』을 배웠습니다. 언제나 같은 문장을 많은 아이들과 함께 외우고 합창을 했다는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같은 시기에 동초(황건룡)라는 선생이 집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 그는 서울, 북경 등 많은 먼 지역의 문명의 찬란함과 중국이나 서양의 위대한 고전을 들려주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글씨나 그림은 예술로서가 아니라, 수신이자 우주의 섭리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반듯이 앉아 조용히 사물을 바라보며 호흡을 고르게 하고 붓 끝에 기를 집중시키는 연습이 중요했습니다. 그런 다음 붓으로 힘차게 점 찍고 선 긋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삼라만상을 점에서 시작하여 점에서 끝난다고 하며 그 베리에이션이 사람이 되고 나무도 되고 구름도 되고 흩어지면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국의 『주역』에 있는 사상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 지금도 나의 발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할 때보다 때때로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지었는데 그 사색적인 태도가 내게 전염된 것 같습니다.

 

 

Q. 자신을 예술가로서 자각하신 경험은 어떤 것입니까? 자신을 예술가로 여기게 한 여러 가지 정신적 경험들에 대해 분명한 연대기적 설명을 해주실 수 있는지요?(미셀 앙리시)


A. (……) 그러나 점차 좌절감을 느끼고 슬럼프에 빠졌는데, 나의 생리가 정치와 맞지 않는다는 느낌과 내가 생각하는 이념보다 현실은 살아 있고 불투명하고 그러면서 앞서가는 것임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르바이트로 그림을 그려 팔기도 하고 전람회도 보러 다니는 등 취미적인 감각에서 미술에 점차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미술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 소리치고 다녔습니다. 미술가를 부끄러운 직업으로 여겨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때 동초 선생이, 너는 그림을 잘 그리지만 커서는 학자나 정치가가 되어야 해. 놈팡이나 여자나 아이들이 놀이로 하는 그림 따위는 사내의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라. 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립니다.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미술 따위에 생애를 걸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인지 한사코 피하려 했던 미술이 본업이 되고 말았으니 지금도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하는 작업은 미술이면서 어딘가 미술을 넘어선 그 무엇이기를 바라는 데가 있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일본 작가로 간주되는 한국인의 위치에 계셨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둘러싼 혼란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이러한 경험이 본인의 문화적 뿌리를 상대화시켰습니까, 아니면 더욱 짙게 하였습니까? 질 들뢰즈는 우리가 제2국의 언어나 문화를 배울 때, 사실상은 내면적으로 세 번째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경우가 거기에 포함되는지요?(미셀 앙리시)


A. (……) 나는 일본에서 작가로 출발하였고 일본을 소개하는 많은 외국전에 출품하였습니다. 또한 한국 쪽의 그룹전이나 국제전에도 출품한 적이 있었고요. 그런데 1968년에서 1970년경까지는 일본에서 국적이 문제되어 일본의 정부 주최 미술전이나 국제전에 출품을 거절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한두 명을 뽑을 때는 일본이나 한국 양쪽에서 스포일당했습니다. 나는 1969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미술 활동에 들어서서 수많은 민족적인 수모와 차별에 시달렸습니다. 반대로 한국에서도 내가 일본에 산다는 것이 극렬한 비난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국가나 민족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유럽을 중심으로 개인 활동에 역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도 조금씩 이름이 나자 이번에는 동양인이라는 레테르가 편견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의식이나 활동은 문화적인 뿌리를 상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것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개인적인 가능성과 더 큰 보편성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한동안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핑퐁 공의 입장이었으며 유럽을 오가면서 이 입장은 더욱 심화되어 세계 어느 곳에도 완전 귀속할 곳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어도 상대화되고 불신이 심화되면서 언으를 넘어선 차원을 꿈꾸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경우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제3의 언어가 내면화되는 것도 아니고 양쪽 언어의 충돌에서 비언어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Q.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집중과 의식의 엄청난 힘으로 가득 차 있고, 제스처의 체계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S. von Berswordt-Wallrabe의 『Lee Ufan, Encounter with the Other』(『이우환, 타자와의 만남』)에서 다루어진, "차이와 반복"(질 들뢰즈의 1968년 저서이기도 함)의 효과들로 뒷받침되는 조형적 특징을 갖고 있는 제한된 그룹, 국제적으로 알려진 미니멀리스트적 또는 급진적 아티스트들의 집단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들 역시 타자와의 관계를 가리키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에 있어서, 완성품과 도덕적(또는 인본적) 의도의 형태 사이에서, "차이"와 "반복"의 중요성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미셀 앙리시)


A. 나는 어릴 때부터 훈련해온 전통적 표현 방법에 입각하여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여 콘셉트와 손과 붓과 물감, 캔버스, 공기, 시간 등의 유기적인 힘으로 만남의 장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림에 필요한 요소들이 나의 신체를 매개로 하여 어떤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의 제스처는 나의 신체에 의한 만남과 출생의 의식(세레모니)이며 세계와의 끝없는 순화작용입니다. 나는 세계 속에 얽혀서 존재하고 이것이 매너와 윤리의 근거이며 작품과 그 품위의 출발입니다. 나와 세계와의 관계 자체가 어쩔 수 없는 윤리인 것입니다. 이 관계는 내가 살아 있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고 그 지속은 끝없이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재생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차이와 반복입니다. 원래 차이와 반복은 에너지(생명)의 운동 방식을 뜻합니다. 기계는 차이가 없는 동일성으로 반복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행위에서는 의식의 개입으로 차이를 낳고 그 차이성이 동일성을 지탱시키는 반복을 부릅니다. 이것이 지속의 의지입니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힘(생명)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 식으로 풀이하면, 언제나 좀 더 좋게, 좀 더 높게, 좀 더 순화되게, 좀 더 철저하게, 이렇게 무한히 '좀 더'를 소망하는 데에 재생이 있고 동일성과 차이성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작업에서 보면 같은 콘텐트인데도 끝없는 반복의 정화작용으로 외형이 뉴트럴해지고 미니멀해져서 자기의 버릇이나 냄새도 지워진다는 얘기입니다. 재생의 의지로 반복이 지속되는 한 작품은 끝없이 순화되면서 새로운 생명감에 차 있게 됩니다. 그런데 작품의 생명감은 나를 넘어선 그 무엇입니다. 그림으로 엮어지는 생명감은 그 복합성이나 반복성에 의해 순도가 높아지고 질서감이 깊어지면서 온 생물의 호흡이나 우주의 파장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나를 넘어선 생명의 타자성이고 보편성입니다. 작업이 주변의 소재나 공간, 시간과의 연계에서 출발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관통하고 나를 넘어선 그 무엇이 되었을 때 비로소 어쩔 수 없는 타자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거기 있는 작품이 타자가 아니라 보는 이와 작품의 만남에서 끝없이 태어나는 것이 타자라는 뜻입니다. (2012. 8. 27)

 

 

 

☎ 댓글란은 두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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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우환 1936년 경남 함안 출생.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 미술가. 서울대 미대 중퇴 후 1956년 도일. 니혼대학 철학과 졸업. 일본 전위예술운동인 '모노하'를 이끌었음. 2010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우환미술관이 나오시마에 세워졌고, 2011년 백남준 이후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대형 회고전이 열린 바 있음.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베르사유궁 전시회의 2014년 초대작가로 선정됨. 에콜 데 보자르 초빙교수. 다마미술대학 교수 등 역임. 2013년 '금관문화훈장' 수훈. 저서 '시간의 여울' '여백의 예술' '양의의 예술'. 시집 '멈춰서서' 등. 일본, 프랑스, 한국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현대문학' 2016년 1월호, 362쪽).
2. Michel Enrici 1945년생. 정기적으로 전문지에 기고하는 프랑스의 칼럼리스트이자 예술비평가, 역사가. 다수의 정부자문위원회 위원. 현대예술 혹은 컨템퍼러리 창작작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도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음. 디종국립미술대학교와 마르세유-리미니미술대 총장. 매그재단장(2006-2009) 등을 역임. 현재 자신이 2002년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회장직을 수행한 모나코 조형예술 및 무대예술대학교 예술기술위원회장('현대문학' 2016년 1월호, 3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