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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최영미 『내가 사랑하는 시』

by 답설재 2016. 2. 19.

최영미 『내가 사랑하는 시』

해냄 2012(초판6쇄)

 

 

 

 

 

 

 

 

찻집 The Tea Shop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 정규웅 옮김

 

그 찻집의 소녀는

예전만큼은 예쁘지 않네.

8월이 그녀를 쇠진(衰盡)케 했지.

예전만큼 층계를 열심히 오르지도 않네.

그래,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우리에게 과자*를 날라줄 때

풍겨주던 청춘의 빛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겠네.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넘칠 듯한 찻잔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여인을 뒤에서 지긋이 응시하는 중년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의 여느 다방에서 목격되듯이) 응큼하거나 추잡하지 않다.

 

번뜩이는 비유 없이도 성실한 상황묘사만으로 훌륭한 시가 되었다. 계단을 오르듯 하나 하나 언어를 쌓아올려 친근하면서도 낯선 구체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언뜻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절제된 수식이 돋보인다. 청춘의 빛을 잃은 뒤에야 쓸 수 있는, 소박한 여운이 오래 우려낸 차처럼 은근하다.

 

――――――――――――――――――――

* 영어 원문에는 머핀 'muffin'으로 되어 있다.

 

 

 

"인생의 가장 짧고도 절묘한 표현"인 시, 그 "시를 쓰지는 않더라도 시를 알아보는 맑은 눈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며, 세상의 수많은 시 중에서 딱 55편을 소개한 시집입니다.

 

소개된 시에 대해 뭐라고 덧붙이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고 우스운 일이어서 저 「찻집」 한 편을 옮겼습니다.

 

"황진이 이후 이 땅이 낳은 최고의 시인"이라고 한 김기림 시인의 「길」,

신동엽 시인의 「그 사람에게」(이 시에 대해서는 "이보다 간단명료하게 쓸쓸한 우리 시를 나는 못 본 듯하다"고 했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새」

그 세 편 중 한 편을 옮길까 하다가 '번역만 제대로 해주면 다른 나라 시인의 시도 감상할 수 있다'는 걸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서 「찻집」으로 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