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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마르시아스 심 『떨림』

by 답설재 2016. 1. 8.

마르시아스 심 연작소설 『떨림

문학동네, 2000

 

 

 

 

 

 

 

 

「딸기」「샌드위치」「나팔꽃」「우산」「밀림」「피크닉」「베개」「발찌」등 여덟 편으로 된 사랑 혹은 섹스 이야기.

 

먼 옛날 내가 아주 젊고 자유로웠을 때, 나는 장차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그래서 언젠가 소설가가 된다면 무엇보다 우선 내가 사랑했던 여자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리라 작심했었다.(11)

 

「딸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이미 방탕한 성 체험을 지닌 주인공이 대수롭지 않게 동정을 바친 두 자매를 별 즐거움도 없이 차례로 안았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 두 자매는 '흙탕물 속의 맑은 기포처럼 깨끗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서인 듯, 블라디미르 나브코프의 『로리타』 첫머리가 인용 표시 없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로리타. 내 생명의 빛, 내 가슴의 불꽃, 나의 죄악, 나의 영혼. 로―리―타. 혀끝은 입천장 밑에서 구른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마지막 세 걸음째 이빨과 만난다.

로―리―타.

아침의 그녀는 로였다. 신발을 신지 않고 잰 키가 4피트 10인치인 평범한 로였다. 바지를 입으면 로라, 학교에 가면 돌리였으며,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였다. 그러나 내 품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로리타였다.

그녀말고는 또 없었는가? 있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사실 또 있었다. 그 여자는 다름아닌 로리타의 언니였다. 로리타의 밋밋한 가슴에 묻은 내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로리타가 깎아먹은 참외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바로 그곳, 나의 숙소인 여관 구석방 나의 담요 위로, 나는 로리타의 언니를 유혹했던 것이다.(30~31)

 

 

 

 

 

그렇게 '깨끗한 기억'으로 남은 그 기포는 '혼탁한 것이건 순결한 것이건 모든 종류의 성애가 내내 그의 누추한 삶에 찍어놓게 될 이미지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딸기」의 끝부분일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세월이 흘러가듯이 내게 뭔가 의미를, 생의 가치를 일러주려 했던 그 아름답고도 순결했던 여자들은 모두들 바람 속으로 떠나가버리고 말았다. 아아, 질투의 화신인 세월은 내게서 그 아름다운 여자들을 다 빼앗아가버리고, 단지 색 바랜 몇 점의 추억과, 밤새 자판을 두들겨대야만 하는 가련하고 하찮은 소설가 한 사람을 내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리하여 그 가련한 소설가는 사라져버린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이렇게 남루하고 남루한 노래를 부를 뿐이다.(37~38)

 

비장감(悲壯感) 때문일까? 이 부분을 읽으며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돈 후안주의'의 끝 부분.***

 

쾌락은 금욕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쾌락과 금욕이 동일한 헐벗음의 두 가지 모습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육체에게 버림받고 제때에 죽지 못했기에, 자기가 찬양하지도 않는 신과 얼굴을 마주한 채, 삶을 섬겼듯이 신을 섬기며, 허공 앞에 무릎 꿇고 깊이도 없는 무언의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서 종말을 기다리는 가운데 끝까지 희극을 연출하는 한 인간의 모습, 이보다 더 끔찍한 모습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어느 언덕 위, 외따로 떨어진 스페인 수도원 어느 골방 속에 파묻힌 돈 후안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듯하다. 혹시 그가 무엇인가 바라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져버린 사랑들의 환영이 아니라, 아마도 불등걸처럼 뜨거운 총안(銃眼)의 틈으로 내다보이는 스페인의 어느 고적한 평원,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쳐 보이는 듯한 찬란하면서도 혼이 없는 대지일 것이다. 그렇다. 이제 우수에 차고 또한 햇빛 찬란한 이 이미지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궁극의 종말,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코 자원했던 것은 아닌 그 종말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초(抄)를 마련해 놓고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두 가지의 발문에서 표지 등에서 '알리는 글'로 쓰인 부분을 옮겨 놓는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깊어지거나 발전한다기보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꼬리를 물고 같은 방식으로 연속되는 이 섹스에 대해 우리는 산만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산만함은 방법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되는 낭비인데, 작가가 진정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이 바닥이기 때문이다. 바닥의 특성은 순결함이다. 이 바닥 이후에 한 존재는 삶에 헛된 기대를 걸지 않을 것이며, 과잉한 소유를 탐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상처를 털어내고 본질적인 불안만을 지닐 것이다.(300~301)

 

                                                 황현산(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낭비 또는 방법으로서의 섹스」

 

……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성욕은 순수한 본능으로서의 생의 의지일 뿐, 거기에는 그 어떤 다른 목적도 들어 있지 않다. 살기 위해 먹고 마시듯이, 작품은 살기 위해 여자들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경배하는 '나'라는 인물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소통의 욕구이며, 결국은 하나가 되어야 할 충만한 자기 존재를 회복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박철화(문학평론가), 「여자와 생, 저만치 어른거리는 얼굴」

 

 

 

 

 

사랑에 관한 글은 읽기가 어렵다. 쓰기는 얼마나 더 어려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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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현산(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낭비 또는 방법으로서의 섹스」(발문) 298쪽 참조.

** 위 발문.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0(개정 1판19쇄), 116~117쪽. 『시지프 신화』는 「부조리의 추론」「부조리한 인간」「부조리한 창조」「시지프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분은 「부조리한 인간」 중 '돈 후안주의'의 끝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