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호칭 선정 문제는 자주 사람을 난처하게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뭘 좀 물어보고 싶을 때도 그렇습니다. 늙은이('어린이'가 존대어로 쓰인다면 그 말에 맞선말로서의 늙은이)에게 묻기는 그렇고, 아무래도 대답을 잘할 것 같은 '젊은이'에게 라면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지…….
"이봐, 젊은이!"
"어이, 형씨!"
"이 보세요!"
그러면 자칫하다간 무슨 시비가 붙는 상황이 벌어질 우려가 있지 않습니까?
한 번은 "아가씨!" 하고 불렀더니 나와 동행인 사람이 피식 웃었습니다. 술집 여자 부르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참, 그렇게 잘 하면 자신이 나서서 물어볼 일이지……'
Ⅱ
TV에서는, 산속에서 혼자 생활하는 사람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볼 때,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맛집' 같은 걸 물어볼 때, 아무래도 교사나 교수 같진 않은데도 "저― 선생님!" 하는 경우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사전을 봤더니 아뿔싸! '선생님'이란 ⑴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두루 이르는 말' 외에 ⑵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예 : '낚시에는 내가 선생님이다.' '이 방면에는 김 씨가 선생님이지요.'도 있고, ⑶ '성(姓) 또는 직함 따위에 붙여 남을 존대하여 이르는 말'도 있습니다.
그럼 교사들을 차별화해 주고 싶으면 어떻게 합니까? '교수님', '판사님', '의원님' 같은 건 좋고 굳이 '교수선생님' '판사선생님' '의원선생님'이라고 하면 웃기는 호칭이 되겠지만, 글쎄요, '교사님', '의사님'은 영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칭의 개선에 관한 무슨 선도적인 역할을 맡았는지, 아니면 장난을 치자는 건지…… S대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어떤 녀석은 굳이 "교장님!" "교장님!" 하고 불러 기분을 잡치게 하고 있습니다.
Ⅲ
2000년대 초에 광화문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이모!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 하는 걸 보고 '저 사람은 이모네 식당에 왔구나. 좋겠네' 했었습니다. 참 어리석기는……
"이모!" 혹은 "언니!" "사장님!" 하고 불러서 득 좀 보고 싶은 경우 말고, '하나만 낳아서 잘 살기' 운동의 결과 고모와 함께 이모가 있는 경우가 드물게 되어 뭐가 뭔지 모르고 쓰는 사람도 있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서는 뭐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주인장!" "주모!" 하고 부르면 '미친 놈'이 될 것이고, "이 보세요!" "저기요!" "여기요!"…… 많긴 한데, 어떤 식당에서는 그렇게 부르면 얼른 대답해 주지도 않습니다.
아내는 "이제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전국에 두어 명 밖에 없을 것"이라며 나를 아주 별종 취급합니다. 그러면 대뜸 "그럼 할머니라고 할까, 아가씨라고 할까?" 하고 응수하지만 세상이 또 변하여 어느 날 그 "아주머니!"가 "주인장!" "주모!"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Ⅳ
그러다가 이번엔 "아주머니!"를 애용(?) 한 것으로도 충격을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은 "이모!" 하고 부른 경우와 다를 바 없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어서 나 역시 뭐가 뭔지 모르고 그 호칭을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 나오는 장면입니다.1
"너는 다시 이 에미에게로 돌아왔구나."
어머니는 웃으며 말하였다. 어머니가 즐겁게 웃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리고는 우리들, 나와 동무들은 매일 산 위 못에서 목욕했고, 모교 운동장에서 정구를 했으며, 저녁에는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고 또 노래했다. 만수는 황홀하게 피리를 불었다. 용마는 그가 갓 읽은 톨스토이의 소설을 곧잘 이야기했다. 기섭은 언제나 조용했으며 다른 사람 이야기만 들었고 또 웃었다. 세 사람이 다 우리 어머니를 아주머니라 불렀다. 종종 마음씨 좋은 구월을 채전으로 보내어 익은 오이며 수박을 따오도록 했다. 내가 동무들과 모여 앉아 있을 때, 어머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기쁘게 생각하고 즐겨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Ⅴ
이번에는 『동물농장』 『1984』를 쓴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읽다가 발견한 사실입니다.2 당시 영국에서는 우리처럼 손님('고객')이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에게 호칭으로 선심을 쓰는 게 아니라 가게 종업원이 손님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자기"라고 불러 주어 선심을 쓰는 장면입니다.3
여자 바텐더들은 손님 대부분의 이름을 알고,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들은 모두 중년이며(개중 둘은 머리를 자못 놀라운 색조로 물들였다) 모든 손님을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자기'라 부른다.('오빠'나 '언니'가 아니라 '자기'다.4 바텐더가 아무에게나 '오빠'니 '언니'니 하는 바는 대개 막가는 분위기라서 불쾌해진다.)
"아무에게나 '오빠'니 '언니'니 하는 바는 대개 막가는 분위기라서 불쾌해진다"? 왜 그러죠? 기분 좋을 텐데?
Ⅵ
지금은 어떤지, 영국 같은 곳에서도 혹은 세계적으로, 아니면 선진국에서도, 이젠 식당 종업원에게 "이모!" "자기야!" 그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종업원이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호칭의 상향에 힘쓰는 사례를 보여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간에 "여보" "당신" 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데 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당신5이 어쩌고" 하다간 봉변을 당하기 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이모" "언니" 다음엔 또 어떤 호칭이 쓰일지 궁금해집니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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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륵/전혜린 옮김,『압록강은 흐른다』(범우사, 1997, 3판3쇄), 216쪽.
2. 오늘날에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내 딸과 사위가 오면 자세히 물어볼 작정입니다.
3. 조지 오웰 에세이, '물 속의 달'(이한중 옮김,『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1, 250쪽).
4. '자기'는 'dear'를, '오빠'나 '언니'는 'ducky'를 번역한 것이다.(이한중 역주)
5. 사전에 나타나 있는 '당신(當身) : 주요 뜻 ① ‘하오체’의 말씨를 쓰는 문장에서, 듣는 이를 가리키는 말 ② 맞서 싸울 때나 언쟁을 할 때 상대방을 얕잡아 가리키는 말 ③ 부부간에 서로 상대방을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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