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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힘겨웠던 설득

by 답설재 2015. 11. 8.

 

 

 

 

힘겨웠던 설득

 

 

 

 

 

2015.1.1.14:02

 

 

 

 

 

 

 

  권력이나 지위, 돈, 지식 같은 걸 가지고 있으면 영향력 있는 말을 하기가 수월한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하는 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게 되고, 특별히 다듬지 않은 말을 해도 듣는 쪽에서 스스로 좋은 뜻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찾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내용을 담지 않았는데도 논리를 세워주고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찾아주는 경우도 봤습니다. 심지어 수다를 떠는 중에 단 한 마디만 쓸모 있는 말을 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영향력을 지닌 사람 아닌가 하고 좀 '삐딱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권력, 지위, 돈, 지식 같은 걸 가지고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한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걸 가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영향력 있는 대화를 시도하는 건 그만큼 어럽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올해 1월 1일, 그날 점심 때, 춘천 쪽으로 옛길을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어느 한적한 식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음력으로는 11월 11일이었고, 소한을 며칠 앞둔 날이었습니다.

 

  중년 남성 둘이서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일, 서빙, 계산 등 모든 일을 다하는 식당이었습니다. 간판은 '○○수산'으로 거창해도 "좀 좋은 걸로 주세요" 해봤자 대답도 하지 않고 "냅킨 좀 주세요" 하면 손가락을 들어서 "저~쪽" 하고 두루마리 화장지를 가리키고 마는 식당, 그 '실비(實費)' 식당에서 생선회와 조개찜을 시켜놓고 둘이서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많이 지쳐 눈조차 풀려 있었습니다. 연달아 불평, 원망,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대하여 내가 궁색한 설명이나 회유 같은 걸 간간히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듣고 싶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달랜다 해도 그 대화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걸 한두 번 경험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달래고 용기를 갖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안고 힘겨운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조개찜이 식으면 대화가 더 썰렁해질 것 같아서 조바심이 일었고, 가능하면 그 조개찜 국물이 식기 전에 생선회도 다 나누어 먹는 것이 좋았습니다. 더구나 그것들을 다 먹고 일어서기 전에 대화도 긍정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마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 그의 불평과 걱정거리를 일단 거의 다 듣고 일어섰습니다.

 

 

 

 

  11월이고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올해도 저물어가고 그날로부터 10개월이 지났습니다. 10개월…… 10개월인데,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다행히 이제 그런 얘기를 들을 단계는 지난 것 같습니다. 의젓하여 나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럴 필요가 있다 해도 이제 내가 다시 그를 마주하여 그런 대화를 할 수나 있을지, 그런 용기를 낼 수나 있을지, 그럴 힘이 남아 있기나 한지 모르겠고, 그 10개월 만에 나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린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은 나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그런 '힘'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계산해 보자 싶어서 구체적으로 이것저것 따져보고는, 그 변화에 놀라움과 서글픔을 느낍니다. 영향력이니 뭐니 할 것도 없는 '바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누구와 마주 앉아 논리적인 설명을 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고 타일러야 하고 달래야 할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옛 시골집 그 사랑방 서쪽 문에 비치던 석양을 자주 떠올리며 지냅니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던 그 환한 빛은 어린 시절이나 고향집에 대한 모든 일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나의 모든 일들을 기억해 내는데 필요한 단 하나의 열쇠가 되었고, 따라서 그 열쇠는 나에게 끝없이 피어오르는 향수의 실마리이기도 합니다.

 

  2015년 1월 1일 낮, 그 대화를 힘겹게 이어갈 때, 허름한 그 식당 차양에 비치던 겨울 한낮의 저 따뜻한 햇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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