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들 적는군"
2○○○년 □월, ○○○ 장관은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딸만 셋인 그는 퇴임 직후 미국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딸의 연주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장관 후보로 예정됐던 ◇◇◇이 갖은 구설에 휘말리며 국회에서 의원들의 호된 질타로 흔들리자, 정부는 진퇴양난에 처했다. 결국 ◇◇◇후보는 국회에 자료로 제출하지 않은 주식거래 명세가 폭로돼 낙마했다. 그 여파로 ○○○ 장관의 유임이 결정된 △월 어느 날, ○○○ 장관은 간부회의에서 "지난번에는 내가 (장관직에서) 나간다니까 뭘 지시해도 수첩에 받아 적지 않더니 이제 유임됐다니까 열심히들 적는군"이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간부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Ⅰ
인터넷에 실린, 한 주간지 기사입니다. 이미 공개되었는데도 도저히 그대로 인용할 수가 없어서 저렇게 ○◇□△를 넣었습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더러 저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웬만해선 "지난번에는 내가 (장관직에서) 나간다니까 뭘 지시해도 수첩에 받아 적지 않더니 이제 유임됐다니까 열심히들 적는군" 하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가 있겠습니까?
또 웬만해선 "지난번에는 내가 (장관직에서) 나간다니까 뭘 지시해도 수첩에 받아 적지 않더니 이제 유임됐다니까 열심히들 적는군" 하는 '뼈 있는 한마디'를 듣고도 그대로 앉아 있을 만큼 뻔뻔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겠습니까?
Ⅱ
사실은 살아오면서 '뼈 있는 한마디'를 더러 한 적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소개합니다.
교육부에서는 각 시·도 장학사·장학관·과장 회의, 학교 선생님들 혹은 교장 연수회나 워크숍을 수없이 개최했습니다.
그렇지만 학교 선생님들이나 장학사들에게는 단 한 번도 저 '뼈 있는 한마디'를 한 기억이 없습니다. 수백 명이 모여도 그분들이 괜히 어려워하면 저도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러웠습니다.
일전에 어느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더니 강사소개를 하던 교장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이분 이름을 모르는 교원은 간첩이라고들 했습니다"
그동안 이런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아, 그때 조심하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뻔했구나!' 아찔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Ⅲ
그렇지만 장학관이나 과장 정도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꼴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런 기세로 현장 선생님들을 다그칠 것 아닌가 싶어서 눈에 불이 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 어깨에 힘 좀 빼고 들어오세요!"
인사말을 하라고 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삼삼오오 회의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고함을 친 일도 있었습니다. 그 한 마디 때문에 회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보나 마나였겠지요.
나에게 그런 말을 들은 그들은 지금도 나를 '나쁜 놈'으로 기억하겠지요. 그동안 '제까짓 녀석이 잘 되는지 보자!' 하고 벼루었겠지요?
퇴임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다 그만인데―그들이나 나나 다 고독한 신세인 건 마찬가지인데― "잘 되고 못되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들이나 나나 물러났는데 누가 쳐다봐 주기나 합니까?
눈이나 깜짝합니까?
Ⅳ
저 장관의 앞날도 그렇지 않을까요? 워낙 훌륭하고 유명한 분이어서 우리 같지는 않을까요?
어쨌든 한때 더러 '뼈 있는 한 마디" '입바른 소리'1를 하며 살아온 것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어서, 해야 할 때가 오기를 벼루고 있었고, 그 순간 워낙 시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저 장관도 이미 이런 걸 다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 고독과 우수(憂愁)를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싶다는 뜻입니다.
2013.11.11. 저녁의 고독
- '문 바른 집은 써도 입바른 집은 못 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너무 바른말만 해도 남의 미움을 사게 된다는 뜻이랍니다. 이런 속담을 듣거나 읽으면 섬찟하지만 그 버릇을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수양이 덜 된 탓일까요? 그럼 언제가야 수양이 다 되는 것일까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