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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흡연자 헬무트 슈미트의 행복

by 답설재 2015. 11. 22.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의 블로그 《현강재》에서 「애연가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라는 글을 봤습니다.

 

며칠 전 서거한 독일의 전 총리(사민당) 헬무트 슈미트는 애연가로 유명하다. 정상회담, 기자회견, TV 인터뷰 등 어디서도 그는 담배를 물고 등장해서 줄담배를 피워댔다. 하루 평균 60개비를 피웠고, EU가 금연령을 내릴까 겁이나 38,000 개비의 담배를 숨겨 두기까지 했다. 현대 정치인 중 유례없이 지성적이고, 문화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위대한 독일인>, <유럽의 현자>를 불리며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끝내 담배의 유혹은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도 그는 96세 까지 장수했으니 그 또한 흥미롭다.

 

이것이 전문(全文)입니다. 필요한 부분만 옮겨쓴 것이 아니라 이 5문장이 전부입니다.

 

현강재》의 그 글에는 헬무트 슈미트의 사진도 여섯 장이 실려 있는데 모두 담배를 피우는 모습들이어서 얼른 인터넷 검색창에 "헬무트 슈미트"를 넣어봤더니 위와 같이 이미지 세 장이 떠올랐는데 정말로 모두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안병영 전 부총리는 교육부에나에게 여러 번―사실은 만날 때마다―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 좀 끊으면 좋겠다"고 했었습니다.

 

장관실에 들어갈 때는 마치 링에 오르는 선수처럼 무슨 각오 같은 게 필요해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가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담배를 피운 후에는 꼭 입을 헹구고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빙그레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은 담배를 적게 피웁니까? 냄새가 덜 나네요? 건강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죠."

 

건강을 생각해서?

글쎄요, 아마도 여럿이 회의하다 말고 자리를 비우는 것도 그렇고, 결재를 받을 때마다 가까이에서 대화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그럴 때 담배 냄새를 맡아야 하는 고역이 여간이 아니어서 그렇게 종용했을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안 부총리(2003.12.24~2005.1.4)에 앞서, 이상주 전 부총리(2002.1.29~2003.3.6)는 청와대 수석도 하고 울산대 총장을 오래 한 분으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때문에 워낙 골치가 아팠던지 끊었던 담배를 새로 피웠는데 무슨 일로 모였는지 기억 나진 않지만 몇 사람의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피운 담배를 겨우 끊었는데 저 김 선생이 교과서 문제를 일으켜서 다시 피우게 됐어."

'누가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서 일으키나, 원……'

 

그분은 그 즈음 어느 학교에 나갔을 때에도 잿떨이를 달라고 해서 한 대 피웠고, 공교롭게도 그 사실(!)이 한 신문에 기사화되었는데, 그날 저녁에 장관실에 들어갔더니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참……. 별게 다 신문에 나네 ……. 김 장학관! 그 담배 있거든 한 대 줘 봐."

 

 

 

 

안병영 전 부총리는 전화를 하게 되면 요즘도 묻습니다. "이제 담배 안 피우지요?"

 

피우고 싶어도 못 피우는 신세가 된 건 병원에 실려갔을 때였습니다. 남들은 중환자실에서 두세 시간이면 일반병실로 옮기는데 나는 그곳에서 2박 3일을 지냈고, 장시간의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니까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그대로 내 몸에서 분간할 수도 없는 여러 갈래의 줄이 각종 기기로 연결되어 있는 기막힌 일이 벌어져 있어서 금단현상이고 뭐고 없이 47년이나 피운 담배가 저절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담배를 끊지 못해 씁쓸한 표정을 짓는 이들을 보면 동정심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사실은 부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나 같으면, 오래 살기 위해서 금연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헬무트 슈미트의 경우에는 '정상회담, 기자회견, TV 인터뷰 등 어디서도 담배를 물고 등장해서 줄담배를 피워댔고, 하루 평균 60개비를 피웠으며, EU가 금연령을 내릴까 겁이 나 38,000 개비의 담배를 숨겨 두기까지 했는데도 96세까지 장수했다지 않습니까?

 

그러한 사실은 건강이니 수명 연장이니 하는 걱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안이 벙벙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겠지요?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 좀 끊으면 좋겠다"고 해온 안병영 전 부총리는 헬무트 슈미트에 대해 "96세까지 장수했으니 그 또한 흥미롭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한 대 피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내는 그때 병원에서 내가 "나중에 이제 입원을 해봤자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겠다 싶으면 다시 담배를 피우겠다"고 하자, 대답이 급하기도 하고, 오죽하면 저런 말을 할까 딱하기도 하고, 우선 급한 일도 아닌 걸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지 선뜻 그러라고 대답했지만,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119를 불러 병원으로 실려 가는 소동을 빚었기 때문에 이제 넌더리가 났을 것입니다.

넌더리, 그렇지 싶어서 나는 담배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담배 피우는 사람이 눈에 띄면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 생각 저 생각 깊어가는 생각을 따라나서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딱 한 대만 피우더라도 아내에게는 "극비"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의사들이야 "헬무트 슈미트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이백 살은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헬무트 슈미트는 이미 저승으로 가버렸으니 그걸 누가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의사들이야 병든 사람을 고치는 사람들이니 굳이 그런 걸 증명하고 싶어 할 리도 없습니다.

 

 

 

 

어떻게 따져도 헬무트 슈미트는 참 행복했던 사람입니다.

 

하기야 나처럼 단 한 개비만이라도 피워볼까, 이 나이에 담배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38,000개비도 엄청 많은 양이긴 하지만, 하루에 60개비씩 피운 그의 경우에는 EU가 금연령을 내릴까 봐 겁이 나서 숨겨둔 담배가 겨우 38,000개비였고, 그렇다면 그의 흡연량을 1/3로 줄여 하루에 한 갑씩이라 하더라도 2년분이 되지 않으니 그걸 다 피우고는 어떻게 하려는 것이었을까, 고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그는 행복했던 사람이 분명합니다. EU는 끝내 헬무트 슈미트를 곤경에 빠뜨리지는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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