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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by 답설재 2015. 10. 3.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압록강은 흐른다

범우사, 2004

 

 

 

 

 

 

독일에서 살다 간 이미륵1이 1946년에 출간한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70년 전에 초판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것은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1973년 가을이었습니다.

 

황해도 해주에서 보낸 소년 시절 이야기2와 서울에서의 유학 생활,3 독일을 찾아가는 여정4을 그렸으므로 자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스물네 편의 일화를 엮는 작품으로도 보였습니다. 불과 오십여 년, 산업화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간 모든 것들이 영롱하게 빛나면서 다 잊고 만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일제의 침략과 신구 문화가 교차하는 시기의 사회상도 새삼스럽게 다가오고, 상하이에서 독일까지 여객선 폴르카 호와 기차를 타고 가며 보고 느낀 것들이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집니다.

 

작품해설에 소개된 당시 독일에서의 서평 중 일부입니다.5

 

" (…) 이 사랑스러운 책에 내포되어 있는 불변성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균일성은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비록 슬픔이 어떤 사람의 영혼에서도 없어질 수 없을지라도."(Wilbelm Hausenstein)

" (…) 우리들이 만났던 가장 순수하고도 섬세한 사람이었던. (…) 이방인인 그가 우리들에게 외계와의 이해에 있어서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것을 더욱 더 깊이 파고 또 깊이 실천해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Piper Verlag 후기).

 

독일어로 쓰여진 이 책을 전혜린이 번역한 것은, 이우환 화백이 일어로 쓴 책들이 생각나게 했고, 일본군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에서는 오늘날 북한 주민들의 탈북을 떠올렸습니다.

서정적인 장면 몇 군데를 골라 보았습니다.

 

 

삼문(三門) 위에서 음악이 들려오면, 흥겹던 우리들의 놀이도 곧 조용해졌다. 이 문은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거리 한가운데 목사집 현관 앞에 있었지만, 고요한 저녁에는 황홀한 음악이 곱고도 맑게 남문까지 울렸고, 우리들의 뛰는 마음을 어둠 속에서 아늑히 가라앉게 해주었다.

그것은 목사의 저녁 인사였다. 낮이 기울고 밤이 깃들이 시작하면 사람들은 근심 모르고 편히 쉬기도 했다. 우리 고장에는 그윽한 평화가 지배했다.

밤의 고요가 살며시 밀려왔다. 집집마다 연기가 오르고 회색 지붕들은 하나씩 저녁 노을 속에 잠겨갔다. 다만 높은 산봉우리만이 아직도 하늘의 푸름 속에서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다시금 낮이 지나고, 이제는 신비의 밤이 둘러싸나보다 하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34)

 

이제 나는 이 아무런 잡음이 없는 고요한 마을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따금 소가 '음매' 하고 울고 조수가 굴 바위에 부딪쳐 깨어졌다. 내가 한밤중에 문을 열었을 때, 저만치서 물결 치는 파도를 보았다. 이 모래 사장은 은빛 파도에 휩쓸려 가지도 않고 다만 고요히 소리를 냈다. 어두운 언덕 앞에 있는 지붕은 퇴색한 달빛 아래 잠들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또한 이 마을의 모든 것이 꿈인지 아닌지를 몰랐다.

농부들은 이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모를 심었다. 집에서는 여자들이 실이며 직조물을 바랬고 누에고치를 길렀다. 숲에서는 종달새와 뻐국새가 공중을 날며 노래 불렀고, 미나리아재비며 들장미가 아름답게 피었다.(132)

 

우리는 원주민 마을에 갔다. 두 줄의 집들이 좁은 거리에 서 있을 뿐이었고, 길은 햇볕에 타고 있는 사막에서 다른 사막을 향해 뻗어 있었다. 집 안팎에는 흑인 남녀가 서서 그들의 크고도 맑은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좁은 거리로 갔다가 속히 되돌아왔다. 사막 한가운데의 이 마을은 얼마나 외로워 보였는지 몰랐다. 우리들은 입구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곧 우리 배로 돌아왔다.

그곳엔 졸졸 흐르는 시내도 없고 과일 나무도, 물결 치는 곡식 밭도 없었다. 다만 두 개의 빈약한 그늘을 지워주는 길의 대열만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고요한 달밤에 무엇을 생각하는지.

우리는 홍해(紅海)를 항행하였다.(194)

 

밖은 온통 여름이었다. 정원이며 길에는 꽃이 피었고 향기가 그윽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면적인 안정이 없었으므로 산보하지 않았다. 나는 어제쯤 학문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이 어려운 말을 배우게 될는지 몰랐다. 밖에서 사람들과 만나면 아직도 낯선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 생생하였다. 늦은 저녁 시간, 모든 것이 조용해지면 나는 시내를 따라 거닐거나 버드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았다. 조용히 흐르는 물의 광경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시내는 가볍게 찰랑거리며 내 앞을 흘러 내렸다. 나는 언제나 저 물이 자꾸만 흘러서 결국은 한국 서해안에, 어쩌면 연평도에, 어쩌면 외로운 송림만에 닿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푸른 하늘 아래 이 섬과 이 포구가 스쳐 지나갈 때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곧 북편에 암석 많은 수양산이 솟아올랐고, 조그마한 기선은 조심스레 용지에 들어갔었다. 나를 배에서 데려가기 위하여 기섭, 용마, 그리고 만수가 와 있었다. 이 친구들과 다시 만나 웃으며 농담하며 고향의 들을 건너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 마을을 찾아갈 때에는 얼마나 기뻤던지. 어머니는 대문에 서서 나를 맞아들였다.

"너는 다시 이 에미에게로 돌아왔구나."(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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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륵 박사는 1899년 3월 8일 출생하여 1950년 5월 20일 향년 51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서울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가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의 압박을 피하여 독일로 건너가 공부를 하였다(해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및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1928년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음). 그 후 문단 생활과 대학의 강의로 파란 많은 생을 누리었다. 그는 또 열렬한 반 나치스의 평화주의자였다. 히틀러 정권에 반항하여 사형당한 쿠르트 후버 교수와도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나치스 시대엔 인종 차별 문제 때문에 그의 생활이 무척 고생스러웠을 것이라 믿어지며, 조국이 광복된 오늘날 귀국의 기쁨을 갖지 못하고 이국에서 별세한 것은 무척 슬픈 일이나 민족 상잔의 6.25를 보기 전에 별세한 것만이라도 다행이었다고 독일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뮌헨 교외의 그래팰핑 묘지에서 쓸쓸히 잠들고 계시다. 그의 여덕(餘德)은 오늘까지 널리 미쳐, 독일인들은 이미 6.25 전란 전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이 비상했고 한국인의 깊고도 맑은 정신에 감탄하였다. 그는 수많은 학술 논문 외에 민속학, 중국학에 업적을 남겼고, 1948년부터는 뮌헨 대학에서 중국학과 한국어를 강의하였다.(역자 후기 및 날개의 저자 소개에서 발췌함.)
2. 수암과 같이 놀던 시절, 독약을 먹은 장난꾸러기, 습자지로 만든 연, 종각이 있는 놀이터, 즐거웠던 설놀이, 불공을 드려 준 여인, 병석에 누운 아버지, 유리창이 달린 새 학교, 수소-인력-에이브라함 링컨, 방학은 즐거워라, 가을도 가고 겨울이 와서, 상복을 입고,외로운 포구 송림 마을.
3. 유럽에의 꿈을, 가뭄은 계속되고, 입학 시험, 서울 유학 무렵,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기미 만세의 절규 속에.
4. 압록강은 흐른다, 중국의 하늘, 바다를 건너가며, 마르세유 항구, 꽈리에 붉게 타는 향수.
5. 이 책 208~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