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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Rue des boutiques obscures』

by 답설재 2015. 9. 10.

파트릭 모디아노 Patrick modiano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Rue des boutiques obscures』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2015

 

 

 

 

 

 

기억 상실자 기 롤랑(페드로 맥케부아)이 바스라진 과거를 복원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불확실하고 모호함을 쓸쓸하고 아름답게 엮어갑니다.

그의 '과거찾기 여행'에 따라나선 것처럼 읽혔습니다. 추측해보고, 확신하고, 실망하고, 아득함, 호기심, 두려움 같은 것도 느꼈습니다. 기 롤랑이라니, 프랑스 인이고, 분명히 초면(初面)인데, 이 작가의 다른 소설 『도라 브루더』에서 만난 낯익은 사이 같았습니다.

 

 

47개 장(章) 중에는 몇 페이지 짜리도 있지만 때로는 딱 한 줄일 때도 있어서 불안, 초조,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옮긴이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에 대해 "그의 인물들은 망각과 고독과 침묵으로 구멍 뚫린 존재들"이라고 했습니다. 또 문체는 짧고 간결하며, "건너뛸 수 없는 침묵 사이사이로 놓여 있는 명사구들은 닻을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섬들을 연상시킨다"고 했습니다.**

 

덧없음을 느끼게 해주는 문장을 좀 모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9. 첫 문장)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환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75~76)

 

그 무렵 우리 두 사람이 걷고 있던 파리는 그 스쿠피의 형광빛 양복만큼이나 여름 같고 비현실적이었다. 몽소 공원의 철책 앞을 지날 때면 우리는 쥐똥나무가 향기로 물들이는 밤 속에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자동차들은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다. 빨간 신호등과 초록 신호등이 부드럽게 저 혼자서 켜졌고, 그것들의 채색 신호들은 종려나무 잎들이 일렁거리는 것만큼이나 유연하고 규칙적으로 교차되었다.(169)

 

게이 오를로프가 오퇴유 경마장 쪽으로 매우 아름다운 정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을 큰 건물과 창문들. 그녀의 첫 남편 월도 블런트는 그 여자가 늙는 것이 두려워 자살했다고 내게 말한 바 있었다. 그 여자는 자주 창문을 통하여 경마 광경을 내다보았을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매일 혹은 하루 오후에만도 여러 번, 여남은 마리의 말들이 마장을 따라 질주하며 장애물에 부딪히며 거꾸러지곤 했다. 그리고 그 장애물들을 넘어선 말들은 아직 몇 달 동안 더 보이지만 그것들도 다른 말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때마다 다른 말들과 교체해야 할 새로운 말들이 끊임없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정열이 마침내는 부서져버리고 만다. 그런 광경이 우리 마음속에 자아내는 것은 우수와 실망뿐이며, 어쩌면 경마장 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게이 오를로프는…… 나는 앙드레 빌드메르에게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는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경마 기수였으니까.(201~202)

 

기차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풍경을 뚫고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그 풍경이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했던가. 나는 그 잠든 집들을 보면서 그 때까지 한 번도 느껴본 일이 없었던 도취감과 안도감을 느꼈다.(226)

 

때때로 다른 친구들이 가고 난 뒤 우리는 단둘이 '남집자성'에 남아 있곤 했다. 산장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저 아래 눈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던 그 마을을, 마치 성탄절 때 진열장 안에 만들어놓은 장난감들처럼 조그만 마을의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그 맑은 밤들을 나는 다시 살아보고만 싶다. 그런 밤이면 모든 것이 단순하고 걱정 없어 보였으며 우리는 미래를 꿈꾸곤 했다. 우리는 이곳에 정착하고 우리 아이들은 마을 학교에 다니고 지나가는 가축떼들의 방울 소리 속에 여름이 올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아무 일 없는 생활을 하리라.

또다른 밤에는 눈이 내렸고 나는 숨이 막히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드니즈와 나는 결코 이 곤경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233~234)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다른 끝,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262. 끝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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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러지는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으로 대표되는 생의 근원적 모호함을 신비로운 언어로 탐색해온 현대 프랑스문학의 거장. 1945년 출생, 소설 '에투알 광장'으로 로제 니미에상, 페네옹상(1968), '외곽순환도로'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1972), '슬픈 빌라'로 리브레리상(1976),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콩쿠르상(1978)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청춘 시절'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팔월의 일요일들' '도라 브루더' '신원 미상 여자' '작은 보석' '한밤의 사고' '혈통'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지평' 등이 있다. 201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작품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