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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TELLING TALES 』

by 답설재 2015. 8. 9.

나딘 고디머 엮음, 이소영·정혜연 옮김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TELLING TALES 

민음사, 2010

 

 

 

 

 

 

 

맨 앞의 「블도그」(아서 밀러) 이야기입니다.

 

소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강아지를 무릎에 둔 채 초록색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여인이 곁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머리숱이 아주 많아 분명치는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더 난감해졌다. 그러자 여인은 물을 마시겠느냐고 물었고 그러겠다고 하자 개수대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동안 소년은 일어나서 강아지를 다시 상자 안에 넣을 수 있었다. 유리잔을 들고 여인이 돌아왔다. 소년이 잔을 받자 그녀는 가운을 살짝 열어젖혀 공기가 반쯤 찬 풍선 같은 가슴을 내보이며 소년이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다시 말했다. 소년이 물을 들이켠 다음 잔을 돌려주려고 하자 갑자기 여인이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여인이 그런 행동을 하는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년은 도저히 여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겨우 보려고 했을 때에도 어슴프레한 얼굴과 머리카락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손을 뻗자 소년은 종아리로부터 전율을 느끼기 시작했다.(18)

 

강아지를 사러간 소년이 강아지 주인 루실을 만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열세 살 소년이 세상과 인연을 맺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살아가면 편하겠지만 이래저래 그렇게만 살 수는 없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이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로버를 볼 때면 여러 번, 소년은 루실이 생각났고 새삼스레 그 열기가 느껴졌다. 현관문 앞 계단에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소년은 여인을, 그 허벅지 안쪽을 떠올렸다. 긴 머리카락에 목선만 생각날 뿐 여전히 여인의 얼굴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20~21)

 

그러다가 데리고 온 그 강아지를 잘 관리하지 못해 헤어지게 됩니다. 이래저래 소년은 루실에게 또 가보고 싶습니다. 다만 또 강아지를 사러 왔다고 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할지 생각할수록 어려워집니다.

 

소년은 여인이 로버를 감싸 안고 그 작은 코에 뽀뽀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루실은 정말로 강아지를 귀여워했다. 그런데 어떻게 로버를 키우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단 말인가? 가만히 앉아서 여인을 생각만 하는데도 소년은 빗자루 손잡이처럼 단단해졌다. 전화를 해서 식구들이 로버가 심심하지 않게 강아지를 한 마리 더 키우자고 한다고 얘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런데 그러자면 아직도 로버를 키우는 척해야 하니 거짓말이 두 개로 늘어나는 셈이었다.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소년은 약간 두려워졌다.(24~25)

 

살아간다는 것은 인연을 맺는 것이고, 인연은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고결하기도 하고 귀하거나 귀찮기도 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애틋하고 그립기도 하고…… 그리하여 변하지 않고 살아가면 좋을 사람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인간의 길이 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소년은 자신 안에 무엇인가 매여 있던 것이 풀렸거나 통째로 무너져 내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비어 있거나 투명하지 않았고, 실제로 누군가에게 말한 것도 있지만 아직 말하지 않은 것도 있는 비밀과 거짓말로 묵직해져 있었다. 자신의 비밀과 거짓말은 모두 정나미가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이제 가족들과 분리되어 약간 떨어진 곳에서 가족,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응시할 수 있었다.(26)

 

 

 

아서 밀러 Arthur Miller · 블도그   가브리엘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 사랑보다 위대한 죽음
에스키아 음팔렐레 Es'kia Mphahlele · 조용한 거리
살만 루슈디 Salman Rushdie · 불새
잉고 슐체 Ingo Schulze · 휴대폰
주제 사라마구 José Saramago · 켄타우로스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 납의 시대
귄터 그라스 Günter Grass · 증인들
존 업다이크 John Updike · 죽음을 향한 여정
치누아 아체베 Chinua Achebe · 설탕쟁이
아모스 오즈 Amos Oz · 바람이 가는 길
폴 서루 Paul Theroux · 강아지의 온기
미셀 투르니에 Michel Tournier · 당나귀와 황소
은자블로 온데벨레 Njabulo Ndebele · 아들의 죽음
수전 손택 Susan Sontag · 편지 장면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Claudio Magris · 과거의 영광
하니프 쿠레이시 Hanif Kureishi · 마침내 만나다
크리스타 볼프 Christa Wolf · 파랑에 얽힌 이야기
우디 앨런 Woody Allen · 불합격
나딘 고디머 Nadine Gordimer · 최고의 사파리
오에 겐자부로 Kenzaburo Öe · 이 땅에 버려진 아이들

 

 

작가들이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은 작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비교적 짧아서 미셀 투르니에의 「당나귀와 황소」 중에서 '황소'를 옮겼습니다.

 

당나귀는 시인이고 문학적 기질이 풍부하며 수다스럽다. 황소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 거의 없다. 명상적이고 과묵하며 사색적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생각은 아주 많다. 심사숙고하며 기억한다. 커다란 바위만큼이나 무겁고 거대한 황소의 머릿속에서 태곳적 형상들이 떠돌고 있다. 그중 가장 유서 깊은 형상은 고대 이집트에서 비롯되었다. 아피스라는 황소의 형상으로 벼락에 의해 수태된 동정녀 암소에게서 태어났으며, 이마에는 초승달이, 등에는 독수리가 달려 있다. 그리고 혀 밑에는 쇠똥구리를 감추고 있다. 그 황소는 신전에서 산다. 이 모든 형상들을 머릿속에 간직하는 황소가, 성령으로 잉태된 한 처녀가 마구간에서 하느님을 낳았다는 소리에 감동을 받으리라고 어찌 기대하겠는가!   황소는 기억한다. 젊은 시절 자신을 떠올린다. 대지의 여신 키멜레를 기념하는 추수 감사제 행렬 한가운데서 온통 포도송이로 장식한 채, 포도 따는 소녀들과 올챙이배에 얼굴에는 홍조 띤 숲의 요정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다.
황소는 기억한다. 시커먼 가을 들판. 대지 위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면서 쟁기로 땅을 파헤치던 일, 멍에를 함께 진 동료,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던 따스한 마구간을 기억한다.
황소는 암소를 꿈꾼다. 새끼를 낳은 빼어난 어미 암소. 부드러운 자궁. 너그럽고 살아 있는 이 풍요의 뿔 속에서 부드럽게 밀고 나온 송아지의 머리통. 주렁주렁 달린 어미 소의 분홍색 젖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젖.
황소는 잘 알고 있다. 동정녀의 산고와 아기 예수의 탄생을 흔들림 없이 잘 지켜 내어 남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자신의 커다란 덩치가 완수해야 할 책임이라는 것을.(259~260)

 

언젠가 노루님의 블로그 《삶의 재미》에 소개된 책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나는 게으른 편이고 그 게으름을 자책하면서도 점점 더 게으르게 살아가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