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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Daddy Long Legs』

by 답설재 2015. 7. 19.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 Daddy Long Legs

김양미 옮김, 인디고 2014

 

 

 

 

 

 

 

아이들 곁에 있는 사람은, 부모든 보모든 교사든 이런 책은 꼭 읽어야 합니다. 블로그 「BLUE & BLUE」가 아니면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쑥스러운 일이지만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교사 출신 독자다운 말을 보탠다면 "아이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라고 아이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판사야 어차피 우리나라 어른들은 책을 잘 읽지도 않고 그렇다고 선생님들을 기대하기는 더 어렵고 하니까 "이 책을 아이들에게 사주겠다"고 하면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고전의 즐거움"이라는 알쏭달쏭하고도 아름다운 문구로 선전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책을 "어른들을 위한 교과서"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이들에게는 교과서가 많으니까 더 보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반문할 사람이 있긴 할 것입니다.

"교과서는 어렵고 딱딱하고 알쏭달쏭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 어른들의 교과서가 아이들 교과서보다 더 쉽고 재미있으면 되겠어요?"

 

 

 

'십칠 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평범한 가정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고아들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해 낼 수가 없는, 불쌍하고, 그러면서도 열정적이고, 모험심 강한 고아 소녀 제루샤'의 이야기입니다.1

 

그 소녀가 자신을 대학에 보내 준, 고아원의 평의원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들인데, 그 편지를 쓰고 있는 예쁜 소녀 제루샤2의 성장을 지켜보는 느낌이 따뜻해서 '키다리 아저씨'가 부러워지는 소설입니다.

 

 

 

그 키다리 평의원은 자신에게 학업 진척 사항을 정기적으로 편지로 알려주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학비를 대어 줍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아원에서 본 적이 있지만 그것조차 자동차를 타는 순간의 뒷모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키다리 아저씨 덕택에 대학을 다니던 제루샤는, 그만 뉴욕 최고 상류층 출신 룸메이트 줄리아의 오빠 '저비 도련님'과 사랑에 빠집니다. 이 사랑에 대해 키다리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할까, 혹 질투를 하고 훼방을 놓는 건 아닐까 싶을 때쯤은 이미 이 멋진 청년이 사실은 저 키다리 아저씨와 동일인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지만, 모른 척하고 읽어 나가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들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는 독자도 제루샤 못지 않은 전률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 앞으로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게 해드릴게요. / 당신의 영원한 주디 / 추신: 평생 처음 써보는 연애편지예요. 제가 연애편지를 쓸 줄 안다니 우습죠? (271)

 

 

 

제루샤는 존 그리어 고아원을 싫어합니다. 지긋지긋한 곳이라고 합니다. 리펫 원장도 싫어합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도 제루샤의 세상은 즐겁고 아름답기만 합니다.3

 

여기선 식사 시간이 너무나 즐거워요. 다들 한꺼번에 웃고 농담하고 떠들어 대는데, 식사 전 감사 기도도 할 필요가 없답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누군가에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요.(불경스럽게 들리겠지만, 저만큼 감사 기도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다면 아저씨도 저와 같은 생각이 드실 거예요.) / 즐거운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무엇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 (116)

 

전 천국에는 못 가지 싶어요. 여기서 이렇게나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죽어서까지도 복을 받는다면 불공평하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보세요. (…) (130)

 

 

 

그렇다고 제루샤가 고아원 출신 신데렐라처럼 생활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봐도 본받을 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학비도 거절한 제가, 놀러가는 데 아저씨의 돈을 쓴다는 건 얼토당토않아요! 아저씨는 제가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게 해선 안 돼요. 사람이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못 느끼지만, 그것이 마땅히 내가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다음에는 그것 없이 지내기가 무척 힘든 법이거든요.(213)

 

사랑하는 아저씨께 / 대체 정신이 있으세요? 여자아이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일곱 가지나 보내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전 사회주의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발 그걸 기억해 주세요. 제가 돈만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세요? / 아저씨와 제가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난처한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세요. 전 아저씨가 보내 주신 선물을 돌려드리기 위해 이삿짐 차를 불러야 할 거예요! (230~231)

 

 

 

직접적인 표현 중에는 눈여겨봐야 할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저자 진 웹스터가 제루샤의 편지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생각이 분명합니다.

교육자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부분을 두 군데만 옮겨보겠습니다.

 

아, 성격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어요. 좋은 성격은 추위나 서리에 상처받으면 풀이 죽기도 하지만 따뜻한 햇볕을 만나면 쑥쑥 자라난답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질 거예요. 저는 역경과 슬픔과 좌절이 정신력을 강하게 한다는 주장에 반대해요. 자신이 행복해야 비로소 상대방에게 친절도 베풀 수 있는 법이거든요. 전 염세주의자들을 믿지 않아요.(88)

 

아저씨, 제 생각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상상력이 아닐까 싶어요. 상상력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래야 친절한 마음과 연민과 이해심을 가지게 되니까요. 상상력은 어린 시절부터 길러 줘야 해요. 하지만 존 그리어 고아원에서는 상상력의 싹이 조금만 보여도 당장 짓밟아 버려요. 오로지 의무감만을 강요하지요. 전 아이들이 그런 단어의 뜻은 몰라도 된다고 생각해요. 의무감이란 불쾌하고 혐오스런 단어예요. 아이들은 무슨 일이든 스스로가 좋아서 해야 한다고요.

제가 원장이 될 고아원을 보실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밤마다 잠들기 전에 즐겨 하는 놀이인데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음식고 옷, 공부와 오락거리, 그리고 처벌 규정까지도요. 아주 착한 아이들도 가끔은 말썽을 피우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그 아이들은 행복할 거예요. 얼마나 힘든 성장기를 보냈든 간에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를 갖게 된다면, 아무리 불행해져도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무 걱정 없이 자라게 할 거예요. (146)

 

 

 

제루샤의 깜찍하고,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샐리 맥브라이드가 방금 제 방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집 생각이 나서 도저히 못 참겠어. 넌 어때?"

전 살짝 미소를 지으며 견딜 만하다고 대답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향수병 하나는 안 걸릴 자신이 있어요! 고아원이 그리워서 향수병에 걸렸다는 이야기 같은 건 들어 본 적이 없거든요. 아저씨는요? (37)

 

첫날에는 정말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어요. 누가 모리스 마테를링크(『파랑새』, 『벌』을 쓴 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 옮긴이) 이야기를 하기에, 제가 그 아이도 신입생이냐고 물었거든요. 그 이야기는 곧 학교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답니다. 그래도 전 다른 친구들 못지않게 제가 똑똑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38)

 

 

 

 

 

고운 일러스트들이 들어 있어서 전철 같은 곳에서 읽기는 난처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러면 어때?' 해버리면서 더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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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 17쪽 참조.
2. 「전 예뻐요. 정말이라니까요.」, 이 책 193쪽.
3. 크리스마스 방학 끝무렵에 보낸 편지의 말미: ...사랑을 담아서 주디 추신: 혹시 '사랑을 담아서'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은가요? 그렇다면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고 싶은데, 선택 대상이 아저씨와 리펫 원장뿐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참아 주셔야 해요. 왜냐하면 전 리펫 원장님은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거든요.(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