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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늙어가기

by 답설재 2015. 8. 19.

 

일요일 새벽은 부지런한 이웃 주민이 폐품을 정리하는 소리로 시작됩니다. 그 순간에 부스스 잠을 깹니다. 이 아파트의 우리 동(棟)은 앞과 옆이 열려 있어서 이웃 주민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훤히 보이고 그 길가에 재활용 분리수거함들이 놓여 있습니다.

 

빈 병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일요일 새벽이구나. 그새 또 일주일이 지나가다니……'

그렇게 생각하는 일요일 새벽의 기억들은 쉽게 겹쳐지기 때문에 지난 일주일이 무슨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저 텅 빈 시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월이 빨리 흐른다는 느낌은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2018.5.21. 이 사진을 나중에 덧붙임

 

 

 

순간(瞬間), 순식간(瞬息間).1

처음에 이 말을 만들어낸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으로써 이 말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은 주제넘은 생각도 했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2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지만, 삶의 덧없음을 금강경 '공(空)' 사상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소설 『구운몽(九雲夢)』의 아름답고도 허무한 꿈 이야기,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3은 사실은 매우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수많은 일주일들이 그렇게 가버려서 '이런!' 어느새 노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무얼 잘못 했습니까?

 

노인이 되지 않는 방법, 천천히 노인이 되는 방법 같은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렇다면 '늙지 않는 방법' '천천히 늙는 방법' 같은 쓸데없는 생각은 가능한 한 적게 하거나 아예 하지도 말고, 얼른 포기할수록 좋을 것입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노인으로 잘 살아가는 길을 생각해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길을 써 놓은 글에서 찾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늙으면 왜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한 김대식 교수(KAIST)는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예의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했습니다.4

 

                                                                      졸고 '늙으면 시간이 정말 더 빨리 가나'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635)

 

"늙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의 무관심입니다. 자연이 우리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가지고 우리가 울고불고할 수도 있겠는데, 저는 이걸 오히려 아주 좋게 보고 싶어요. 늙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자연의 무관심으로 해석한다면 상당한 자유가 생긴다는 거죠. 결국 늙음이라는 건 남이 나한테 준 의미가 아니고, 나 스스로 삶의 의미를 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나 스스로 삶의 의미를 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가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의외이긴 하지만, 이런 뜻이라면 당연히 공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열다섯에 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서고, 마흔에 不惑하고, 쉰에 天命을 알고, 예순에 耳順하고, 일흔에 하고싶은 바를 좇되 法度를 넘지 않았느니라."5

 

 

 

여기에 이르러 또 막막해집니다.

하는 일마다 신경이 쓰이고, 원망을 들을 일들 같고, 한 발자국도 쉽지 않습니다. 쑥스럽지만 아내가 보기에는 나는 아직 단 한 걸음도 나아진 점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것도 매양 같고 점잖지 못한 것도 그렇고, 미흡했던 모든 점이 아직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해서 언제 "저도 이제 7학년이 된지 오래입니다" 할 수 있게 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남춘천역 풍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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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눈 깜짝할 사이의 매우 짧은 동안',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 만한 극히 짧은 동안'(DAUM 사전).
  2. 한바탕 꿈을 꿀 때처럼 흔적도 없는 봄밤의 꿈이라는 뜻으로,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DAUM 사전).
  3. 중국의 장자(莊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라는 이치를 설명하는 말. 약어 접몽 (蝶夢) 유의어 장주지몽 (莊周之夢) , 호접지몽 (胡蝶之夢).(DAUM 사전).
  4. 조선일보, 201503.28. Weekly BIZ C4~5. 지식 콘서트 '뇌, 현실, 그리고 인공지능' - “나이 먹는다는 건 자연이 내게 무관심해졌다는 것, 그리고 자유가 생겼다는 것… 삶의 의미를 정할 수 있는”
  5. 原文──爲政 四 子曰 『五十有五에 而志于學하고 三十而立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호라』(表文台 역해 『論語』, 현암사, 1972,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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