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영|하연섭
『한국교육의 패러다임 전환 5·31 교육개혁 그리고 20년』
다산출판사 2015
한때 나는 5·31 교육개혁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때 내 열정의 대부분은 이미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어떤 목표로,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해야 하는지 그 기준을 정하고 관리하는 교육과정 정책·교육과정 행정은, 현실적으로 교육의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교육 지원이 교육 내용보다 우선시되는 우리나라 교육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형편없이 낮은 것이어서 이 책에서는 매우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교육정책, 교육정책 기획을 연구하는 학자나 교원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론과 실제, 정책과 행정의 기획과 실무, 거의 모든 관점에서 문민정부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한국교육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머리말을 옮겼습니다.
글머리에
올해가 흔히 '5.31 교육개혁'이라고 불리는 김영삼 정부의 제1차 <신교육체제> 교육개혁방안이 발표된 지 만 20년이 되는 해이다. 1995년 5월 31일 이후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세 번 더, 모두 4차에 걸쳐 발표된 교육개혁 방안은 우리나라 교육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불러 마땅한 획기적인 성과물로서, 이후 역대 정권들이 그 이념적 성격에 관계없이 교육정책의 근간으로 받아들여 왔다. 이런 의미에서 문민정부의 교육개혁방안은 지난 20년간 한국교육의 중심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가정책 중, 5.31 교육개혁만큼 장기적·거시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구상·기획되고 실천된 포괄적인 정책방안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 최초의 민주정부가 주도한 이 방대한 개혁 패키지는 기존의 '권위관계'에 기초한 위계적, 획일적, 공급자 위주의 교육체제를 자율과 경쟁, 다양화와 특성화에 기초한 수요자 중심의 열린교육체제로 바꾸는 역사적 작업이었다. 그러나 5.31 교육개혁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많은 이가 이른바 '문명사적 변화'에 대응하여 한국교육의 큰 물줄기를 바로 잡은 역작이라고 상찬하는가 하면, 적지 않은 이가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시장주의적 교육개혁으로 한국교육의 본질을 그르친 실패작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5.31 교육개혁의 생명력과 영향력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간 5.31 교육개혁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연구보고서가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이 공식적 문건이나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서술하는 데 그쳤고, 정책과정에 대한 심층적·분석적 연구는 별로 없었으며, 성찰적·미래지향적 분석이나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5.31 교육개혁 20주년을 맞이하여, 5.31 교육개혁과 그 이후의 한국교육의 변화과정을 객관적, 분석적, 성찰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교육의 미래방향을 정립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필자 두 사람은 1) 교육개혁 추진배경 및 그 철학적 기초, 정책의 창안 및 집행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2) 문민정부 이후 역대 정부의 교육개혁의 분석을 통하여 5.31 교육개혁의 주요 정책들이 어떻게 승계, 변용, 발전되었는지를 심도 있게 조명하고 이를 종합적으로 평가한 후, 3) 이를 바탕으로 우리 교육의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 * *
이 책의 몇 가지 특징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5.31 교육개혁에 관한 대부분의 저작들이 개혁의 경위와 내용을 대외적으로 공표된‘공식적’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따라서 정책이 어떻게 형성되고 시행되는지, 그 '살아 있는' 역동적 정책과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개혁을 주도한 공식적 기관과 추진체계, 그리고 산출된 정책의 리스트와 내용만으로는 정책과정에 관여하는 다양한 참여자들의 복잡한 상호관계와 상충하는 이해관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출되는 갈등과 경쟁, 협력과 합의의 역동적 과정을 담아낼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기존 연구에서는 실제로 정책을 창안하고 이를 집행했던 주역들, 즉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는 결국 사람이 만든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교육개혁위원회, 청와대, 교육부가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다루지 못하였다. 이 책을 위해 필자는 이명현, 박세일을 비롯해서 5.31 교육개혁의 정책과정에 참여했던 30여 명의 인사들과 인터뷰를 했다. 실제 일의 주역들, 즉 ‘사람’과 그들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살아 있는' 정책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모든 정책에서 정책의 형성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정책방안을 안출한다고 정책과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5.31 교육개혁이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그것을 대통령이 수용·발표하는 일련의 과정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정책발의'이다. 이를 실제 정책으로 만들고 집행하는 일은 교육부가 하는 일이다. 5.31 교육개혁의 참된 가치는 그것이 단순한 정책안으로 그치지 않고, 정책집행으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정책 산출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정책집행은 정책의 청사진, 즉 개혁방안의 기본정신과 내용에 준거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분명 또 하나의 창조적 과정이다. 개혁안 특유의 이상주의를 정책생태계의 현실에 맞게 조율하고, 입법과정을 통해 법제적 형식을 갖추고, 구체적 프로그램화 과정을 거쳐 집행으로 옮기는 일련의 작업은 단순한 관리·기술적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수한 미시적 정책결정과 이해관계의 조정을 포함하는 정치과정이다. 산출된 정책이 당초의 정책의도와 차이가 나는 경우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5.31 교육개혁의 집행과정에 관한 논의는 어떤 저서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에서는 주요 쟁점 개혁안의 집행과정에서 야기되는 다양한 정치·행정적 갈등과 그 조정과정을 파헤쳐 보려고 애썼다.
셋째, 문민정부 이후 역대 정부들도 시대와 정책생태계의 변화 그리고 정권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교육개혁을 전개했다. 여기서는 정부별로 그 변화의 흐름을 분야별로 추적·분석한다. 이 작업은 역대 정권의 교육정책의 특색을 부각시키는 한편, 5.31 교육개혁의 주요 정책들이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어떻게 유지, 수정, 진화 혹은 폐지되었는가를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문민정부 이후의 교육개혁을 종합평가함으로써, 한국교육의 현주소와 5.31 교육개혁의 명암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넷째,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교육의 미래방향과 이를 추진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새로운 교육개혁을 위하여 '미래한국교육위원회(가칭)'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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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5.31 교육개혁은 이제 지나간 시대의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의 정책 역사, 특히 교육정책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교육 전체를 관통하는 큰 물줄기이다. 그런데 이 연구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5.31 당시의 초기 자료들은 이미 많이 유실되었고, 참여자들의 기억들도 많이 퇴색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자칫하면 5.31 교육개혁에 대해 천편일률적으로 기술된 영혼 없는 공식자료들만 남을 우려가 크다. 따라서 부족하나마 이 책에서 시도한 ‘살아 있는’ 정책과정의 복원은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와 정책개혁가들의 시대적 고뇌와 그들의 정책쇄신 의지,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관료제의 노력을 재현하는 데, 또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탐색, 재조명했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지난 20년간의 한국 교육정책의 살아 있는 역사책이다. 따라서 한국 교육을 탐구하는 교육연구가, 교육정책관료, 교사, 교육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대학원생, 그리고 한국 교육에 관심이 큰 시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외람되나마, 이 책이 이들에게 한국 교육정책사의 핵심 교본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필자들은 5.31 교육개혁을 비롯한 한국 교육개혁의 역사를 논구하면서, 이 책을 통해서 비단 교육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정책영역에서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그 핵심적 조건을 밝혀 보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따라서 이 책은 여러 국가정책 영역에서 ‘거시적 개혁’을 꿈꾸는 정치, 행정 지도자들, 그리고 정책과정이나 정책기획을 연구하는 정치학, 행정학, 정책학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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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병영은 문민정부에서 5.31 교육개혁이 가장 세차게 진행되던 시기(1995.12~1997.8)에, 그리고 이후 참여정부 시절에(2003.12~2005.1) 두 번 교육부 수장으로 재직했다. 문민정부 시절, 5.31 교육개혁의 창안 및 집행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교육부를 떠난 후 7년 만에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는 참여정부에서 다시 교육정책을 관장하며 그 간의 추이를 점검하고 이후의 방향을 세우는 데 일조할 수 있었다.
한편, 필자 하연섭은 연세대학교 행정학과의 안병영의 동료이자 제자이다. 하연섭은 참여정부에서 안병영 교육부총리의 정책보좌관(국장급)으로 지근거리에서 안병영을 도우며 교육정책의 형성과정에 깊이 참여했다. 하연섭은 참여정부 이후 지난 10년간 교육부의 주요 정책과정에 많이 참여하여 한국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관해 많은 경험을 축적, 이미 교육정책연구가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다.
필자 두 사람은 이런 연고로, 그간 한국 교육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고 생각을 나누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공동작업의 결정체이다. 집필은 나누어 진행하고, 서로의 글을 나눠 읽으며 마무리했다. 제2부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은 안병영이, 그리고 제3부 문민정부 이후 역대 정권의 교육개혁은 하연섭이 집필했고, 서론에 해당하는 제1부와 제4부 결론은 공동 집필했다. 그리고 마지막 보론(補論)은 안병영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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