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보기
Ⅰ
책이나 신문을 보며 그 책이나 신문을 읽기보다는 펜을 들고 교정을 보는 자신을 발견하고 실소한 적이 많았습니다. 요즘은 걸핏하면 어느 부분을 블로그에 실을까, 살피며 그러고 있으니 '오십보백보'이긴 합니다.
Ⅱ
벤야민의 친구 숄렘은 벤야민이 당시의 작가들 중에서 프루스트 다음으로 카프카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
이런 문장이라면, 다음 중 어느 것이 이 문장이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까?
① 카프카에게 가장 강한 친밀감을 느낀 사람은 프루스트였고, 그 다음은 벤야민이었다.
② 벤야민이 가장 강한 친밀감을 느낀 사람은 프루스트였고, 그 다음은 카프카였다.
#2
이런 문장은 어떻습니까?
경주는 약 천 년 동안 신라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글쎄요. '경주는 약 천 년 동안 신라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문화재가 많다.' 혹은 '경주는 약 천 년 동안 신라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3
또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무구 정관 대다라니경은 현재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혹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현재 남아 있는 세계? 현재 남아 있는 세계라니? 그럼 사라져버린 세계가 있다?'
#4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한 번만 더 읽어보면, 당장 고치고 싶어질 문장도 보입니다.
(…) 이후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고 있지 않다….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가 더 나은 문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입니까? 글쎄요.
Ⅲ
더러 이 블로그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문장이 워낙 '거시기'해서 댓글을 쓸 수가 없었어요." "괜히 썼다가 문장이 그게 뭐냐고 꾸중하실 것 같아서요. '학교 다닐 때처럼'요. ㅎㅎ"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 사람은 내가 "마구 써도 괜찮아요." 한다고 해서 '아, 괜찮다니 다행이네.' 할 사람도 아니니까요. 아니, 그렇게 해서 댓글을 달아준다고 해서 나에게 무슨 덕이 될 것도 아니니까요. 실컷 오다가 어느날 돌아서서 영 딴 길로 가버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 붙잡아둔다고 해서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 이래 뵈어도 남의 문장 같은 것 신경 안 써요." 한다고 해서 "아, 신경 안 쓰는구나." 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또 신경 쓰면 어떻고 쓰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퇴직을 한 다음, 신변잡기 몇 편 써본 경험으로 수필가로 등단한 친구들은, 스스로는 삶의 보람도 느끼고 그런 책 만드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일에도 기여하긴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정말 문장가'가 되는 것도 아닌데, '정말 문장가'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하다못해 그런 수필가도 아닌 사람의 사사로운 문장 가지고 괜히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뭐냐, 다만 돈 주고 사보는 책, 신문 같은 것의 문장은 자꾸 눈에 거슬린다는 거죠, 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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