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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어떤 일부터 할까?

by 답설재 2015. 2. 23.

 

 

 

 

 

 

 

선물삼아 전합니다.

선물?

글쎄, "선물"이라고 하려니까 겸연쩍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과일 한 상자 정도의 물건보다는 이 이야기가 더 소중할 수도 있지 싶었습니다.

 

 

 

 

살다 보면 흔히 몇 가지 일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일들을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할 일이 단순해지면 언제인가 싶게 홀가분해지지만, 그런 시간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그러니까 몇 가지 일이 겹칠 때, 어떤 일부터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 일들이 각각 어떤 조건을 가진 것인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예를 들어 내일 아침까지 제출해야 하는 것이라면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연히 그 일부터 해야 하겠지요― 그렇지는 않고 이 일을 먼저 해도 좋고 저 일을 먼저 해도 좋을 때는 흔히 하고 싶은 일부터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선택'은 옷장에 다가가 '이번에는 어떤 옷을 입을까?' 이 옷 저 옷을 살펴보는 '망설임', (사람에 따라서는) '즐거움'과는 다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옷이야 어떤 것부터 입는가에 따라 그 상황이 실제적인 영향을 구체적, 직접적으로 끼치는 것은 아니고 먼저 입고 나중 입는 것에 따라 겉으로 무슨 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꼭 해결해야 할 일들은 어떤 것부터 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나에게 직접적, 구체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더 생기고 덜 생기는 일이라면 까짓거 좀 손해를 보면 그만이지만, 일이 영 낭패스러워질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사람 그렇게 신용이 없는 사람인 줄 몰랐다!"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미리 차근차근 해결하면 일의 성과가 멋지게 나타날 수도 있는데 시간에 쫓기어 허겁지겁, 혹은 짜증스럽게, 혹은 자꾸 내려오는 눈꺼풀을 비비며 처리하게 되면 그 수준이 형편없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어떤 일부터 하는 것이 좋을지 망설이게 될 때, 즉 선택을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상황일 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 답을 어렴풋이 생각해 오던 것이긴 하지만 『현대문학』에서 아주 명료하게 제시해 놓은, 실로 '값진' 글 한 편을 발견한 것입니다.

 

『현대문학』 2015년 1월호, 「20인 에세이―버리지 못한 것들」 중, 김중혁 작가의 「2000년의 방송 편성표」.

그 글에서 발견했습니다.

 

시간을 들여야 끝낼 수 있는 일을 제일 먼저 하고, 그다음에 다른 일을 한다. 아니면, 제일 귀찮은 일을 끝내놓아야 뇌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아니면, 긴장하기 전에 긴장되는 일을 끝내놓아야 한다.

 

 

 

 

김중혁 작가는 2000년에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소설가입니다. 이 '값진' 깨달음은, 작가가 어느 신문사에 근무할 적에 비교적 단순한 업무여서 시간적으로 홀가분하게 여겨도 좋을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성표도 담당했는데, 그걸 가소롭게 보고 마감 시각이 가깝도록 미루어 두었다가 낭패를 본 일로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작가의 이 깨달음을 전수받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옮겨 적는 것을 무슨 선물을 하는 양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지만, 다 『현대문학』을 부지런히 읽은 덕분에 발견한 글이니까 생색을 좀 내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위의 저 멋진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다음 날부터 텔레비전 편성표 일을 제일 먼저 했다. 그걸 끝내놓고 난 후에 다른 일을 했다. 시간 여유를 두고 입력을 하면 오자도 거의 나지 않았다. 긴장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커다란 무엇인가를 배웠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팀장님이 나한테 했던 얘기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저 멋진 문장 바로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집니다.

 

 

내가 배운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성표를 만들고 난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핵심(결론)일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선물삼아"라고 한 것이 아무래도 겸연쩍기는 합니다. 성격적으로 이런 일은 걱정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나 참 별 걸 다 선물이랍시고……'), 이까짓 건 이미 초등학교 때 충분히 겪어 아주 뼈에 사무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어? 난 이걸 초등학교 1학년 때 충분히 익혔는데?').

그렇지만 혹 희희낙락하다가 곤혹스러움, 낭패스러움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깨닫지 못한, 석양을 바라보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기 나 같은 사람이 또 한 명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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