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러운 태극기
Ⅰ
삼일절 아침, 태극기를 달았습니다. 이번에는 관리사무소에서 태극기를 달자는 방송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동안 태극기를 다는 집이 너무 적었습니다. 지난해 한글날만 해도 창문으로 내다보기에는 태극기를 단 집이 단 두 집뿐이었습니다.
관리사무소의 그 방송을 들을 때마다 저렇게 부탁을 하니까 올 삼일절에는 지난해 한글날 같지는 않겠구나, 했었습니다.
Ⅱ
그렇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도 달지 않았네?"
내가 혼자서 태극기를 단 것을 쑥스러워하자, 아내는 한쪽만 봐서 그럴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쪽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Ⅲ
나는 뭔가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멍청하게…… 혹은 뭔가 오해를 하고…… 다들 일제에 항거하여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그날에 대해, 그 의의에 대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태극기를 달지 않는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야, 이 사람아! 정신차려!"
나는 도대체 무슨 정신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 건지 아직은 모릅니다.
Ⅳ
끝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음 국경일에는 나도 태극기를 달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언가 알아채지 못했으면서도 '아, 나도 이제 알겠어!' 하고 드디어 눈치를 챘다는 듯한 표정을 하면 적어도 이 어리석음, 이 우둔함이 묻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왜 어리석은, 멍청한 나 때문에 저 태극기를 외롭게, 쑥스럽게 하겠습니까?
까짓거 달지 않는 건 간단한 일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그런 나를 보고 '잊었나?' 싶어서 무슨 말을 하면 못 들은 척하면 됩니다. 아내는 여러 번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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