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쑥스러운 태극기

by 답설재 2015. 3. 3.

 

 

 

 

쑥스러운 태극기

 

 

 

 

 

 

 

 

 

 

 

 

  삼일절 아침, 태극기를 달았습니다. 이번에는 관리사무소에서 태극기를 달자는 방송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동안 태극기를 다는 집이 너무 적었습니다. 지난해 한글날만 해도 창문으로 내다보기에는 태극기를 단 집이 단 두 집뿐이었습니다.

 

  관리사무소의 그 방송을 들을 때마다 저렇게 부탁을 하니까 올 삼일절에는 지난해 한글날 같지는 않겠구나, 했었습니다.

 

 

  Ⅱ

 

 

  그렇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도 달지 않았네?"

  내가 혼자서 태극기를 단 것을 쑥스러워하자, 아내는 한쪽만 봐서 그럴 것이라고 했지만 다른 쪽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나는 뭔가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멍청하게…… 혹은 뭔가 오해를 하고…… 다들 일제에 항거하여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그날에 대해, 그 의의에 대해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태극기를 달지 않는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야, 이 사람아! 정신차려!"

  나는 도대체 무슨 정신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 건지 아직은 모릅니다.

 

 

 Ⅳ

 

 

  끝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음 국경일에는 나도 태극기를 달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언가 알아채지 못했으면서도 '아, 나도 이제 알겠어!' 하고 드디어 눈치를 챘다는 듯한 표정을 하면 적어도 이 어리석음, 이 우둔함이 묻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왜 어리석은, 멍청한 나 때문에 저 태극기를 외롭게, 쑥스럽게 하겠습니까?

 

  까짓거 달지 않는 건 간단한 일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그런 나를 보고 '잊었나?' 싶어서 무슨 말을 하면 못 들은 척하면 됩니다. 아내는 여러 번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실망- '미리 목을 졸라 숨을 끊어 주는 은혜'도 없는 세상  (0) 2015.03.19
미안한 전화  (0) 2015.03.10
감기 걸려 목이 아픈 날  (0) 2015.02.26
어떤 일부터 할까?  (0) 2015.02.23
위로  (0) 2015.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