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전화
최병룡, 《어린 시절》(부분, 논현동 '취영루' 소장)
Ⅰ
J는 내 제자입니다. 오십이 넘었을 중년 여성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지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러 오십 대의 중년 여성을 그려보긴 하지만 보통은 저 옛날 그 달동네 6학년 교실에 앉아 있던, 그때 그 아이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는 지금 비행기(아니면 기차, 아니면 배, 배도 아니면 자동차)를 만듭니다. 나는 J가 무얼 만드는지 잘 알지만 굳이 그걸 밝히기가 싫습니다.
그가 전화를 걸어올 때마다 고맙고, 자랑스럽고, 미안하고, 눈물겨워합니다. 염치는 없지만 사실은 그 전화를 기다리며 지냅니다.
Ⅱ
J는 공부를 잘 못했습니다. 6학년 한 해 동안 정말이지 나는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열심히 등교했는데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다면 나로서는 얼마나 참담한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아이는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게다가 내가 설명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심심하다고 하거나 내 일이나 다른 아이의 공부를 방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청소 같은 건 남보다 더 잘했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청소 같은 건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내 일이나 친구들의 공부를 전혀 방해하지는 않았는데도 내가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해 지금 와서 교육부나 교육청에서 책임을 지겠다고 할 리도 없고, 결국 사과를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니 이제 정년퇴임을 한 지도 몇 년이 흘러간 나로서는 참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Ⅲ
그와 헤어진 지, 그러니까 그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을 한지 사십 년이 가까운 어느날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누구야?"
"선생님, 저 J요."
"아, 그럼! 그럼! 기억하고말고. 그래, 어디서 뭘 하며 지내?"
내가 어떻게 그 아이를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나는 J가 "왜 나를 그 모양으로 가르쳤는지" 따지기라도 할까봐 당장 미안한 마음이 되어 좀 과장된 억양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묻자 남쪽 어느 해안도시에서 "비행기(아니면 기차, 아니면 배, 배도 아니면 자동차)"를 만든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대답 너머로 태평양의 푸른 물결이 보이는 것 같았고, 파도소리나 사람들이 내는 소음도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저절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와! 대단하네, 우리 J!"
그러자 그가 쑥스러운 듯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그걸 제가 만드는 건 아니고, 저는 그냥 제가 맡은 일만 하는 거죠."
그래서 이번엔 내가 설명했습니다.
"야, 이 사람아! 그럼 사장은 그걸 만들어? 사장은 사장이 맡은 일을 하고, 직원들은 또 각자가 맡은 일을 해서 그 복잡한 게 만들어지는 거지. 그렇지 않아?"
그러다가 그가 또 물었습니다.
"선생님, 많이 아프셨다면서요?"
나는 이젠 다 괜찮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덧붙였습니다.
"이젠 제발 아프지 마세요."
"이젠 제발 아프지 마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뭐라고 대답하는 것이 적절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전화번호가 알려지니까 이 아이 저 아이 돌아가며 한 번씩 연락을 해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J의 그 말은 미안하고도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Ⅳ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J는 그 후로 자주는 아니지만, 1년에 두어 번씩 꼭 전화를 해서 오래 살아야 한다고, 사정이 좋아지면 찾아갈 테니까 지금처럼 그렇게 살아 있어야 한다고 다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알았어. 그때까지라면 얼마든지 좋아! 살아 있을게. 걱정 마. 그 대신 나를 찾아올 만큼 사정이 좋아지면 그것만으로 그만이야.'
Ⅴ
그렇지만 그가 혹 정말로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맞이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J.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 것, 미안해. 그런데도 넌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었구나……."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될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쑥스럽지만 이런 고백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J, 넌 그때 날 좋아했니? 아무튼 난 지금 널 좋아해. 아니, 사랑해. 짝사랑이지만 많이많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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