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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한 개의 시계, 여러 개의 시계

by 답설재 2015. 3. 29.

 

 

 Ⅰ

 

 

시계가 하나뿐일 때는 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졌습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세상에는 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 시각이 표준시각이 아닌 '가짜 시각'일 것이 뻔한데도 시계를 바라볼 때마다 '아, 벌써 11시 35분이 넘어가는구나!' 하며 거의 분 단위까지 그 시계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계가 흔해져서 이 방에도 시계, 저 방에도 시계…… 방방이 시계를 걸어두게 되었고, 화장실에도 전화와 시계 등의 기능을 갖춘 무슨 기기가 붙게 되었으며, 컴퓨터 화면도 늘 시각을 표시해 주는데도 이 컴퓨터 옆에까지 시계를 두었고, 서장, 진열장 안에도 탁상용 시계를 넣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구석에 쌓아둔 책 더미 위에도 시계를 얹어 두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구입한 건 아니라 해도 생생하고 멋진 시계들이니 재활용품 분류로 처리하기도 난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저 여러 개의 시계 때문에 또 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느 시계도 정확한 시각을 알려주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느 시계가 나서서 "다른 시계에 속지 마십시오!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정확한 시계입니다!" 혹은 "내가 가리키는 시각이 진짜입니다!" 하고 주장해 주지도 않으니까 어느 것이 정확한 시각인지 알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그 시계들 중에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가 있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내가 믿어주지 않게 되었고, 모두들 제각기 다른 시각을 가리키므로 나는 이제 어느 것도, 그 여러 개의 시계 중에서 단 하나도 믿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 중에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믿어주지 않으니까― 아예 믿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으니까 ―그 시계들은 억울하겠지만 한꺼번에 '가짜 시계'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드디어 나도 저런 시계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