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실제』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공저), 두산동아, 1994.
Ⅰ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학교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해왔습니까? 현장 교원들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는 '교육과정'이라는 문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학교 교육과정'이라는 말은 거의 듣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나도 한때 교사였기 때문에 확언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아니 그렇게 몇 년간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교육과정』이라는 그 책자는 교감이나 교장만 보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교과서와 전과, 수련장 같은 것을 보는 것이어서 교사가 교장, 교감이나 보는 책을 찾는 것은 무슨 불경(不敬)에 해당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진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교사들이 수업을 공개하면 교장, 교감은 그 책을 펴보며 "교육과정을 보면 목표가 이러저러한데 김 선생님은 오늘 그 수업을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꾸중을 시작할 때 사용하는 '정부 지침'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Ⅱ
그 '교육과정'이라는 것, 소중한, 비밀스런, 인쇄된 『교육과정』 책자를 내 손으로 처음으로, 직접 만져본 것은, 읍내 서점에서였는데 '어? 이 책이 왜 여기에?' '일반서점에서 이런 걸 팔아도 되나?'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얼른"('그 책은 파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어쩌다가 거기 꽂혀 있었던 것이라고 하면?' '그래서 안 팔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한 권 구입해 와서 신기한 느낌으로 들여다봤습니다.
그날 그 순간의 느낌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Ⅲ
이 세상에는 '학교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나로서는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제6차 교육과정(1992)이 나왔을 때였는데, 당혹감을 느낀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교 교육과정?'
'그런 걸 학교에서 만들어도 될까?'
'그 중요한 일을 학교에 맡겨도 괜찮을까?'
'학교라는 저 분주하고 다양하고 수준도 들쑥날쑥한 곳에서, 더구나 시끄럽고 먼지도 많이 나는 그 곳에서, 전국의 그 모든 학교에서, 각각 다른 교육과정을 만들게 한단 말이지?'
교육부 편수국에서는 제6차 교육과정(1992) 고시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을 '교육과정 편성·운영 역할 분담 체제'로 전환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즉 학교 교육을 위한 기본 계획 수립에서 국가는 공통 기준(국가 교육과정), 시·도교육청은 지역별 지침(교육과정 편성·운영 지침)을 만들고, 전국의 각 학교는 개별적으로 이 기준과 지침에 따라 실제적인 교육과정(학교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체제로 전환한 것입니다.
Ⅳ
운명이란 참 오묘한 것이라더니……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던, '금서(禁書)' 쯤으로 여기던 내가 어쩌다가 『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실제』라는 제목을 붙인 저 책의 공동 집필자가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때는 마침 편수국 교육연구사로 일할 때였는데, 어느 날, 예닐곱 명의 장학관, 교육연구관, 교육연구사로 이루어진 팀이 마련되었고, 아직 애송이었던 나도 그 팀에 들어가서 이 책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학교 교육과정을 남보다 먼저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Ⅴ
이 자료가 나온 후로는 '학교 교육과정'에 관한 자료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교육과정 기준' 또는 '학교 교육과정'이 드디어 일반화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일반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학교현장에서는 아직도 '교육과정', '학교 교육과정'이 수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교육과정' 또는 '학교 교육과정'은 방치되고, 교과서가 교육의 목표와 내용, 방법, 평가를 좌우하는 권위를 지닌 '성전(聖典, 바이블)'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Ⅵ
나는 저 '교육과정' 또는 '학교 교육과정' 때문에 교육부 편수국의 그 선배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고, 나중에 장학관, 과장으로서 내가 그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기간에는 송구스럽게도 그 조직이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겨우 유지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었고,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일들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혼신을 다했습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요즘 공무원들은 그때 내가 일할 때의 나와 내 동료들보다 머리도 훨씬 더 좋고 문서도 더 잘 만들고 하는 것 같은데도 왜 '교육과정' '학교 교육과정'의 일반화는 조금도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Ⅶ
이 책은 많이 팔려서 재판이 나오고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이 책에 실린 내용을 집필한 편수관들이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교육과정 해설』(총론편)에도 실었고, 교원들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내는 그 책을 많이 봤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각급 학교에 '학교 교육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린 것만으로도 이 책의 소임은 충분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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