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데가르트 하브리크 편, 정승일·김만곤 역
『지구촌 어린이들이 본 세상』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 재판
「내가 만든 책」이라고 기록해놓으면 잊고 지내도 좋겠다며 훌훌 넘겨보다가 눈에 띈 것이 후기(後記)입니다.
'아!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었구나……'
'다시 펼쳐보면서도 모르고 지나갈 뻔했네?'
이십여 년 전 일을 스스로 대견해했고, 이 글을 발견한 것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겠지만, 지금 다시 쓴다 해도 빼거나 고치고 싶은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ㅎ
이 책을 읽게 된 어린이와 어른들께
나는 사회과의 내용 중에서도 우리나라나 다른 여러 나라의 이모저모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과에 관한 국민 학교 교과용 도서들은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참고서, 대학 교재, 심지어 영어로 된 책이나 논문까지 더듬거리며 읽고 있습니다. 신문 기사들을 오려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에도 정열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책에도 없는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발견은 내게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여러 나라 어린이들도 모두 우리처럼 자기들의 나라를 "우리나라"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린이들도 가족과의 따뜻한 생활을 즐거워하고, 가까운 사람의 불행을 가슴 아파 하면서, 먹고, 놀고, 숙제하고, 읽고, 보는 일에서 우리 어린이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그 고장을 이 세상 어떤 곳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들의 조상과 민족에 대해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의 이 발견을 우리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 있는 책들에 소개된 다른 나라에 대한 글들은 노련한 학자들이 쓴 것임에도 영토, 자연 환경, 인구, 자원과 산업, 종교 같은 내용을 평면적으로 소개하여 사진과 지도까지 보면서도, 그 곳에도 우리처럼 이렇게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각과 느낌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를 배우는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가 그런 나라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며, 그러한 관계는 영토, 자연 환경……에 대한 지식의 암기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그 사람들의 마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지리'가 이 세상 여러 곳의 갖가지 다른 점을 찾는 일에 힘쓰는 학문인 점도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세계 여러 곳에도 우리처럼 '사람'이 살며, 그들은 눈동자의 색깔이 다르고 말과 글자도 다르며 음식, 옷, 주택 등 여러 가지가 서로 다르지만, 가장 중요하고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들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학문이 되었으면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생활 무대에 대한 연구보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연구를 앞세우자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애칭을 많이 쓰는데, 그것은 문명의 발달에 따라 교통, 통신, 정보 등이 세계의 모든 지역을 가깝게 이어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구촌이라는 말의 뜻 속에, 이제 세계의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과도 옛날 촌사람들처럼 마음과 마음을 통하며 살 수 있다는 것도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차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자라면, 나라 안에서만 국회의원이나 의사를 하려고 애쓰지 않고, 유엔 사무총장도 하고, 유네스코나 유니세프, 국제 올림픽 위원회 같은 국제 협력 기구의 대표가 되어 수많은 나라들을 시내에 나갔다 오는 것처럼 드나들게 될 것입니다. 세계의 무역에 관한 일들을, 오늘의 미국이나 일본, 유럽 사람들처럼 좌지우지하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빈곤한 생활은 끝내 한국 어린이들이 성장했을 때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해결된다 하면 그리 늦은 일도 아니며, 그 때까지만 기다리는 것은 결코 지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지와 판단과 선택을 위하여, 나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지구촌의 의미를 이 책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방법, 이 책과 같은 자료로써 가르치고 싶습니다. 잘 배운 우리 어린이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면, 비행기 안에서 시계 대신 손목에 찬 컴퓨터로 그 나라의 영토, 인구, 생활환경, 자원 등을 검토한 뒤, 그 나라 대표와 만나자마자 그것이 협력을 위한 것이든 경쟁을 위한 것이든 우리나라와 세계와 인류를 위한 일이 어떤 것인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어른들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그러한 판단의 자료와 판단 결과까지 미리 가르쳐 줄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22개국 46명 어린이들의 글을 우리글로 옮기면서, 각 나라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지도들을 함께 제시해 보았습니다. 때로는 글 아래에 낱말의 설명도 붙였고, 그 어린이들의 글로써 다시 생각해 볼만한 문제도 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인 자료들을 꼭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1981년부터 오늘날까지 나를 가르치고 계시는 정승일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2년간은 밤에 강의실에서 나를 가르쳐 주셨지만, 그 후로는 항상 연구실을 지키시는 모습만으로도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대한 교과서'가 이 책을 출판한 데 대해서는, 광복 후의 우리나라 교육을 위하여 처음으로 현대식 교과서를 만든 바로 그 회사이므로, 고마움과 함께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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