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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 한탄(恨歎)

by 답설재 2015. 1. 19.

1951년 가을 복학해 보니 학제 변경으로 고교 2학년으로 자동 편입되어 있었다. 미군이 학교 교사를 사용하고 있어 변두리 교회나 창고 건물 맨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했다. 요즘엔 상상할 수 없는 학습 환경이다. 교사가 대폭 바뀌었는데 사람됨이나 학식이나 태반이 수준 미달이었다. 이듬해 봄에 학교 교사로 들어갔다. 키 순서로 좌석배치를 받았는데 전엔 앞줄이었으나 이제 중간 줄에 앉게 되었다. 부지중에 키가 큰 것이다. 대학 입시 준비하는 분위기도 생겼다. 진학 않는 고교 졸업생은 간부후보생으로 소집되어 소모 장교로 일선에 배치된다는 얘기가 돌고 있어서 모두 긴장하였던 것이다. 영어 교사가 수준 이하여서 몇몇 호사好事 학생들이 학교장에게 진정을 했다. 입시를 앞둔 시점이니 영어 교사를 바꿔달라는 요청에 영어 교사를 도저히 구할 수 없고,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니 그리 알라는 게 답변이었다.   미 해병대 보급부대 언저리에서 밥을 먹으면서 무언가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 상스러운 음담패설이나 일삼는 노무자와 함께 지내면서 간절한 문화적 갈증을 경험했던 터라 공부는 지상명령이었다. 시원치 않은 학교 수업은 수시로 빼먹고 집에서 공부했다. 매들리의 『삼위일체 영어』를 두 번 통독해서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학교에서 쓰는 3학년 교과서를 단어장 만들며 통독했다. 김기림 번역의 대역서로 서머싯 몸의 「레드」를 재미있게 읽고 내친김에 서점에서 발견한 토마스 하디 단편집도 사전을 찾아가며 읽었다. 모르는 대목도 있었으나 얘기 따라가는 재미로 읽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독문과 재학생이 독일어를 가르쳐 장하구 교과서의 제2권까지 다 뗀 것은 행운이었다. 김기석 지음의 독일어 교과서 두 권은 대학 교재인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일부가 실려 있어 읽어보았다. 「농부는 고향을 사랑한다」는 산문도 기억난다. 영어를 마스터하면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과 좋아하는 문인들이 영문과 출신이란 것도 작용해서 영문과 지망을 결정했다.
1953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대학에 들어갔다. 불문과를 지원한 경북고교 출신 김재권金在權이 500점 만점에 404점으로 수석 합격했는데 재학 중 도미하여 세계적 철학 교수가 된다. 요즘 같으면 그런 고득점자는 고교 담임이 불문과 원서를 써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시절이니 내게도 내 삶의 가장 큰 수수께끼가 되는 사달이 벌어졌다. 90세로 별세한 이승만 박사는 작고 직전 영어를 몽땅 잊어버려 우리말만 썼다고 한다. 비슷한 불상사를 만나 습득한 모든 외국어 단어를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끝내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말이 있다. Schadenfreude란 기막힌 독일어 단어가 그것이다. 그리된 희한한 사연은 독립된 글로 소상히 적어야 할 것이다. 그해 여름 휴전이 되어 학교 준비 관계로 10월 초에 개강을 했다. 장장 80일에 이르는 방학이었다.
환도 직후의 서울은 공해 없는 산책하기 좋은 거리였다. 서울역에서 명동성당이 빤히 보이고 그 사이는 폐허였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폭탄으로 크고 깊은 구덩이가 두셋 나 있었다. 여기저기 조그만 고서점이 널려 있고 종로통에는 대형 고서점이 여럿 있었다. 종로의 지물포 한구석에서 일본의 하기와라(萩原朔太郞) 시집을 발견하고 몇 대목에 끌려 사서 읽었다. 초등학교 때 해방을 맞아 일본어의 문어체는 문맹 수준이다. 구어체로 된 하기와라는 물리칠 길 없는 매혹이었다. 시의 번역 불가능성을 그를 통해 실감했고 그는 많은 대목을 외우고 있는 유일한 일본 시인이다. 을지로6가에 있는 고물상에서 모던 라이브러리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사보았다. 사실상 새 책이라 고가였다. 한 달 전차 회수권값을 날려 청진동에서 동숭동까지 걸어 다녔다. 콘스탄스 가넷의 번역서는 고교 2년생의 구문해독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며칠 걸려 통독하며 전율했다. 서양 근대소설이란 신세계에 빠져 들어가며 고서점에서 구입한 영역본을 읽었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비롯해서 스탕달, 플로베르, 톨스토이, 토마스 만 등을 모두 영어로 읽었다. 번역이 쉬운 탓도 있고 포켓판이 구하기 쉬운 탓도 있었다. 또 쉽게 구할 수 있고 읽기도 편한 서머싯 몸은 거의 전부 읽었다. 때마침 헉슬리 책 열 권이 펭귄문고판으로 나와 구입해서 읽었다.
학교는 얼마쯤 실망이었다. 교재부터 문제였다. 프린트 등사물로 공부하다 보니 오자 고치는 데 수업 시간의 태반을 소비하는 경우도 많았다. 학력 빈곤의 교사도 있었고 준비 없이 시간에 임해 실수하는 경우도 있었고 휴강도 다반사였다. 영문과의 이양하 선생은 사전 편찬 관계로 미국 체류 중이어서 배울 기회가 없었다. 권중휘 선생은 휴강 없이 꼼꼼한 강독으로 많은 배움을 주셨다. 젊은 송욱 선생은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간도 계기가 되어 예이츠, 엘리엇, 오든의 시를 읽었고 엘리엇의 에세이를 정독했다. 가끔 다른 문과 수업을 청강했는데 유혹이 되진 못했다. 시험은 한 학기 한 번이다가 1954년경부터 중간시험을 보았다. 1955년인가 평균C학점 미달이면 졸업이 안 된다는 규정이 생겼는데 학생들의 면학 장려 효과보다는 교수들의 D학점 안 주기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최현배 말본에 초등학교 우등, 중학 20등, 대학은 꼴찌로 나온다는 예문이 있었다. 서정인의 「강」도 그런 모티프를 다룬 수작인데 그 비슷한 화상이 되어 1957년 학교를 나왔다. 헉슬리에 관한 졸업논문은 "To understand Aldous Huxley is to understand something important about contemporary life and literature"라는 첫 문장만 기억되는 기한 내 납품용 속성 조제품이었다. 뒷날 참괴했다. 대학원 시험을 보고 첫 학기 등록금을 냈다. 시골 양복점에서 양복 두 벌 값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연초의 부친 와병과 화불단행禍不單行의 가정 사정 때문에 몇 번의 휴학 끝에 자동 퇴학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은 불편과 계속적인 수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의 메피스토펠레스는 한낮에 나를 찾아왔다. …………………………1


'무슨 한탄?'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강물처럼 유려한 유종호 선생의 글입니다.2

 

"나 이 차 못가게 할 거야!"

"그 놈 당장 이 산비탈로 데려와! 이 쇠몽둥이로 좀 부러뜨려주게."

능히 이런 호기를 부릴 수 있는 "많은 돈·권력·지위·지배력"3은 당연히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이라도 갖추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유종호? 그도 알고보면……"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더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럴 수준도 아닙니다. "딱하구나!"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바라보는 나의 욕심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보다 훨씬 더 일찍 태어났는데도 그 환경을 헤쳐나온 재능이 부럽습니다. 통찰력, 깨달음, 노력……. '노력' 다음에 '행운'도 써야 할까요? 저 글에서는 행운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두뇌도 부럽습니다. 뭘 읽으면 우선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기억력까지 부럽습니다. 어떻게 저런 걸 다 기억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버젓이 써놓은 그의 이력도 부럽습니다. 이건 그가 송두리째 부럽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유종호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서울대 영문과와 미국 뉴욕주립대 대학원 수학. 1957년 『문학예술』 등단. 저서 『유종호 전집』(전5권),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시인』 『나의 해방 전후』 『내가 본 영화』 『시와 말과 사회사』 『그 겨울 그리고 가을』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한국근대시사』 등.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인촌상> <만해학술대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수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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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종호, 「꾸불꾸불 걸어온 길-형성기를 중심으로」(『현대문학』 2014년 12월호, 154176) 중에서(170173).

2.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유종호-특수단체인, 평론가, (전직) 대학교수 출생 1935년 10월 25일 출생지 충북 충주 소속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신체 키 169cm, 체중 67kg B형 데뷔 1957년 문예지 '문학예술' 등단 경력 제36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수상 2007년 제11회 만해대상 학술부문

3.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정현종 옮김, 물병자리, 2002), 173.

4. 『현대문학』2014년 12월호,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