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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내 친구 김 교수

by 답설재 2014. 12. 8.

 

 

 

 

내 친구 김 교수

 

 

 

  김 교수는,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습니다. 또 국내외로 유명한 과학자인 것 같지만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우리말에 대한 상식은 '아직(!)' 나보다 못합니다.

  광복 때 일본에서 들어와 국내에서 중·고등학교는 물론 서울대 전교수석으로 대학교까지 마치고 군대까지 다녀왔는데도 그렇습니다. 그 이후 내내 미국에서 지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른바 '해외파'가 요란을 떨어서인지 요즘 젊은이들이 인터넷에서 "미쿡" 어쩌고 하며 비꼬기도 하지만, 그는 더러 외래어를 쓰면서도 "미쿡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도 많이 어눌합니다. 이번에 나에게 글을 한 편 보낼 일이 있었는데, 날짜가 되자 원고를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파이널 버전은 아닙니다."

  "파이널 버전? Oh! final version!'

 

  '그 정도야 뭐……' 대뜸 알아듣고 "그럼 제가 윤문(潤文)을 해드릴 테니까 그 버전을 가지고 검토하십시오." 했더니,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저- 윤문이 뭐지요?"

  "음…… 빛을 내는 거요. 그 왜 구두를 닦으면 윤이 나잖아요."

  "아-하!-"

 

 

 

 

  김 교수는 해마다 한두 번씩 필리핀으로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가는데 최근에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나이가 나이여서 부담스러운가보다 생각만 하고, 왜 안 가는지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그걸 뭐 하려고 묻겠습니까? 그건 따지고 들면 나더러 왜 영어를 배우지 않느냐고 묻거나 태권도나 검도, 심지어 킥복싱 같은 걸 좀 배우지 그러느냐고 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어디를 간다고 하면, 괜히 좀 걱정이 되고, 다녀왔다고 하면 안심이 됩니다.

 

  혈육이 미국에 있고, 이 나라에만 해도 그를 아끼고, 존경하거나 존중하고, 그와 친밀하게 지내는 과학자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디 그렇습니까? 사무실에서 돌아와 이렇게 아파트에 들어앉아 있으면 아파 누워도, 심지어 영영 일어나지 못해도 그런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는 세상 아닙니까?

 

  그의 전공은 '물리천문학'인가 '소립자 이론과 우주론'인가 뭔가인데, 필리핀을 다녀왔다면서 자랑삼아 준 파일을 열어보면, 이 양반이 이제 과학 같은 건 집어치우고 바다 속 생물에 빠져 있나 싶어집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산소통을 메고 물안경 너머로 남쪽나라 어느 바다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미생물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그 표정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그가 보여준 수백 개의 생물 사진 중에서 여남은 개 실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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