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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아저씨! 잠깐만요!

by 답설재 2014. 11. 26.

 

 

 

 

 

“아저씨! 잠깐만요!"

 

 

 

 

 

 

 

 

 

 

 

 

 

  소년이 전철을 타고 갑니다. 소설의 한 장면입니다. 소년에게는 전철은 이런 곳입니다. 말하자면 낯설게 혹은 역겹게, 짜증나게…… 그렇게 느껴질 요소들이 다음과 같이 열거됩니다.1

 

 

  검버섯으로 뒤덮인 주름진 손등, 손잡이와 함께 흔들리는 하트 모양 귀고리, 터질 듯 불룩한 종이 쇼핑백, 짜증스러운 목소리의 전화 통화, 너무 작은 키, 너무 긴 머리칼, 아디다스와 멘체스터유나이티드, 무병장수 한의원과 경찰공무원 모집, 너무 조잡하게 만들어져 짝퉁으로조차 불리기 어려울 것 같은 명품 로고, 번들거리는 대머리, 양 끝이 아래로 처진 입술, 목을 조르는 듯한 보라색 넥타이, 흉기처럼 보이는 은색 하이힐, 향기롭지 못한 체취, 따스하지 않은 체온, 휴대폰 문자판을 두드리는 손놀림이 묘기처럼 빠르다. 소년은 열여덟, 이 시간대의 1호선 전철 안이 더없이 낯설게 느껴진다.

 

 

  "검버섯으로 뒤덮인 주름진 손등……" ㅋㅋ & ㅠㅠ

  나는 손등도 손등이지만 "검버섯으로 뒤덮인" 얼굴로 전철을 타고 다닙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게다가 키까지 작고, 정말 말도 꺼내기 싫지만 대머리가 다 되었고…… 위의 인용문에서도 이 몰골의 특징을 더 찾을 수 있지만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 좋은 것도 아니고 신나는 것도 아니니까……. 이 생략에 대해 양해 바랍니다.

 

 

 

 

 

 

  환승역 편의점에 들어가 물을 한 병 샀습니다. 돈을 내고 물건을 받았으면 당연히 얼른 나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인데, 가게 출입구에서 우물쭈물 꾸물댄 것입니다.

 

  "아저씨! 잠깐만요!"

 

  그렇게 꾸물댄 것에 대한 반응은 일촉즉발(一觸卽發)이었습니다. 뒤에 있던 젊은 여성은 내가 영 성가셨고 얼른 나를 앞지르지 못해 짜증이 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아니, 나처럼 나이가 좀 들어서 '행동이 빠릿빠릿하지 못한 것들'은 직접적으로 이런 취급을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아, 정말! 1, 2초를 못 참고!"

  그렇게 덩달아 짜증을 냅니까? '적반하장'으로?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합니까? 말하자면 못들은 척합니까?

 

  그것도 아니면…… 나처럼 저절로 풀이 죽어버립니까?

 

 

 

 

 

 

  샤를 단치라는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2

 

 

  비타협적인 청춘의 시기는 지나갔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면서 최고가 아닌 최선을 선택해야 함을 인식한다. 너그러워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죽하면 "너그러워지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늙은이에게 무얼 요구하려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준비가 충분한가?'

 

  대단히 주제넘은 혹은 건방진 일이지만 나는 아직까지 진정으로는 나 자신을 '노인'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을 굳이 '노인 그룹'과 '노인이 아닌 그룹'으로 구분해야 하겠다면 나는 스스로는 결코 노인쪽으로 걸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참으로 기가 막히는 것은, 살아오면서 나도 결국 노인이 될 것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대충 이야기하면 '설마, 설마' 하다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소설 『인생』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3

 

 

  그곳에서 나는 종종 젊은 세대가 그들을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이를 개 몸뚱어리로 먹었나."

 

 

  노인이라고 나이를 개 몸뚱어리로 처먹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인도 젊은이나 아이들처럼 정상적으로 나이를 먹습니다. 해가 바뀌면 떡국도 먹고 하면서,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무심하게, 또는 서글퍼하며, 그렇게 먹는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양력설날에는 '음력설날은 아직은 한참 남았지? 그때 한 살 더 먹는 거지?' 하고 미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동작이 느려지도록 하고 싶어서 이렇게 된 건 아닙니다. 정말 싫고, 죽어도 싫은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에 따라 좀 일찍 이렇게 되거나 좀 늦게 이렇게 될 뿐이지, 다 죽어 가는데도 팔팔한 노인은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외관이 싱싱하지 못하고 볼품없어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들처럼 아름답고 싱그러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거나 입어도 멋스러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고 단언합니다. 더러 그런 것 같은 사람도 별수없이 곧 볼품없어지기 마련입니다.

 

  무엇 하나 스스로의 의지로 그렇게 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래도 억울합니다. 그럼에도 잘난 척하고 싶거나 그렇기 때문에 대접을 받고 싶은 노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노인들 중에는 심지어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좋아. 내대로 살겠어!' 하고 결심이라도 한 듯 독이 오른 것 같기도 한 경우까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나도 정말이지 노인이 싫습니다.

  * 내가 언제 노인이 된 것인지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 다만, 노인이 된 증거만은 남았습니다. 젊었을 때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1. 이신조(단편소설) 「다른 소년」『현대문학』 2013년 6월호, 126~127쪽. [본문으로]
  2.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왜 책을 읽는가』(이루, 2013), 83쪽. [본문으로]
  3. 위화 장편소설/백원담 옮김, 『인생 活着』(푸른숲, 2009, 3판), 6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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