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음을 흘리며 베일을 걷어 올렸네
난해한 행복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풍덩!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네
무사히 아름다운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남녀의 일을 문정희 시인만큼 '리얼하게' 쓰는 시인은 드물 것입니다.
저런 마음으로 신부대기실에 있었던 사람이 한둘이었을까요?
그런 걸 생각하면 세상이, 세상 일들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만큼 재미있게도 생각됩니다. 이건 겉으로 하는 소리이고 쑥스럽지만 새삼스러운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객쩍은 얘기 더 늘어놓기보다 이 시를 소개한 황인숙 시인 얘기를 옮겨씁니다.
아직까지 혼자 지내시는, 아무리 바빠도 고양이 밥 주러 밤새 돌아다니시는 황인숙 시인...
생애 가장 정성껏 아름답게 꾸민 신부가 예식을 앞두고 대기실에 앉아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 고독을 보여주는 시다.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는 결혼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할 수 없는, 여태와는 멀고 다른 삶으로의 이민을 눈앞에 둔 소스라침이다.
많은 기혼여성이 가장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날로 자기 결혼식 날을 꼽는다. 모든 신부에게 이날이 행복한 첫날이기를!
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에서 이 시를 본 것은 2012년 9월 28일이었으니 십 년이 넘었습니다.
황인숙 시인은 월간 《현대문학》에 "2번 생"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에세이를 연재했는데 지난 10월호에 '가을의 안녕'이라는 제목의 글이 마지막 회라고 했습니다.
아... 그럼 어떡하지?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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