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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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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강Aleksandr Kang의 '강제이주'

by 답설재 2014. 10. 23.

 

 

 

 

 

알렉산드르 강Aleksandr Kang의 '강제이주'

 

 

 

 

 

 

 

  강제이주?

  역사 시간에도 배웠겠지만, 일제에 시달리느니 연해주로 떠났고, '도저히 안되겠다!' 싶으면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거기 눌러앉든지 돌아오든지 선택지가 최소한 두 가지는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조선족은 중앙아시아로 가라!"는 통지를 받게 되었을 것이고, 떠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어서 멀리 이사를 갔을 것이라는 게, 막연하지만 '강제이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어서, 알렉산드르 강이라는 작가에 대해서 읽으며, 많이 부끄러워져서, 읽은 자료를 발췌해 두기로 했고, 알렉산드르 강, 그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1938년에 트럭에 실려 갔단다. 그때 실려 간 사람들은 한밤중에 잠불 지방으로 내던져졌지. 사람들과 옷 보따리들을 자동차에서 다 떨구어버렸지. 주변은 온통 초원과 추위가 지배했고, 발밑에는 가는 잡풀들만 깔려 있었지. 사람들은 잡풀들처럼 등을 구부리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자기 소지품들을 주웠지. 그런데 자동차 옆에서는 전권을 쥐고 있는 운전수들이 가져온 술통들을 열어젖히고 만취상태가 되도록 술을 마셔대는 거였어. 고려인들에게도 술을 권했지. 맨정신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을 얼버무리기 위해 일부러 술을 마시게 한 거지. 아낙네들은 울고불고하며 그 사람들의 발밑에 엎드리고 쥐똥나무를 부여잡거나 흙을 갉아 먹기까지 했어. 트럭들에 실려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던 거야. 트럭들은 다시 되돌아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또 날라 와야 됐기 때문이지." 미하일 아저씨는 빈 잔의 술을 따른 후, 그걸 마시고 약간의 안주도 먹었다.

  "그렇게 해서 트럭들은 다 떠나가버린 거야. 다들 술에 취해 가버린 거지. 차들을 덜덜거리며 전속력으로 일부러 구릉들, 웅덩이들을 따라 달려갔어. 운전수들이 분명 모든 기억들을 떨쳐버리려고 일부러 그랬던 거야. 거기에 내팽개쳐진 사람들은 황량한 초원 위를 기어 다니며, 신음을 하거나 울부짖었지. 아이들은 참을 수 없는 절규를 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단다. 목격자도 없었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어. 그런데 아이들까지 왜 그렇게 해야 되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있는 것이라곤 머리 위에 별들밖에 없었지. 그것도 아무 먼 곳에. 포댓자루에서 감자를 쏟아놓듯이 그렇게 사람들을……1

 

 

 

 

 

 

『현대문학』 2014년 4월호, 225쪽.

 

 

 

  알렉산드르 강은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북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경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별하고 소련으로 돌아갔습니다. 북한과 같은 정치 체제 속에서는 도무지 아들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련에서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르'가 되었습니다.2

  그는 명문 모스크바 공대에 진학했지만 전자공학이나 원자물리학은 그의 삶의 근원적 갈증을 해소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공대를 졸업한 후, 다시 러시아 최고 명문인 고리키문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강제이주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인류학적 의미가 아닌 형이상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려인들은 19세기 말 언젠가 극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고려인들은 그곳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면서 자기 최면적인 위안이지만 언제라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1937년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다. 모든 고려인은 동시에 보금자리에서 끌려 나와 중앙아시아로 이송되었다. 이러한 연구물을 읽으며 나는 다시 의문에 빠졌다. 과연 강제이주란 무엇일까? 그 안에 담긴 뿌리 깊은 의미와 거기에 상응하는 중요성은 무엇일까? 그냥 단순히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많은 한국학 연구자들 또는 사학자들이 제기했던 문제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 연구논문이나 회상록을 통해 제시된 그들의 답은 본질적으로 인명이나 시설물 피해에 대한 통계로 극한되거나, 그 이주를 통해 '우리는 고통받았으나 살아남았다'는 식으로 단순히 감정에 호소하는 결론이었다. 이와 같이 감정에 호소하며 이주를 기리는 '기념행사', 서적출판, 회의, 그밖의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지극히 단순할 뿐이다. 즉, 강제이주단한 지 50년, 60년, 70년이 흘렀으나 우리는 살아남아, 자립을 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내용일 뿐이다.

  …(중략)…

  나의 깊은 신념에 의하면, 세계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 악마의 세계는, 아니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의 악마는 강제이주를 통해 우리 모든 고려 사람들에게, 앞으로 너희들이 어느 나라에 흩어져 살든, 번식을 아무리 많이 하든,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우둔하거나 순진한 너희들이 지금은 '존재한다'는 기념행사를 하건 말건 간에 "지금부터 너희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무런 사람도 아니다"라고 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영구히 내려진 선고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선고문에 대한 명백한 해답이 없지 않은가?3

 

 

 

 

 

  그는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판결'에 대해 해답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작가들의 몫일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공학을 버리고 문학을 선택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공중부양'이었습니다. '나는 하늘로 솟아오른다!'

 

 

 

 

 

 

  나는 인간이 공중부양의 재주를 획득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좌절의 힘에 의해서다. 이를 테면, 인간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굴욕을 당하고 이 지상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쫓길 때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날개를 달고, 즉 두 손으로 날갯짓하며, 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온갖 기술들이 다 작동되게 마련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날아올라간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땅 위에다 몸을 남겨둔 채, 즉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자유롭게 방출함으로써 하늘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계관이나 문화 면에서 이방인인 우리들도 희망이 무너지면 마침내 자신들의 따분한 골목길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하늘로 날아가곤 한다. 빠져나와서 증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차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누군가는 순간적인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며 지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지상이야말로 우리를 지켜주는 곳이고 상식이 있는 곳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창작을 통해 날아다니는 방법을 터득할 것이다. 그렇다, 다름 아닌 창작을 통해서이다. 바로 창작이야말로 공중부양이자 지구의 중력을 멋지게 거스를 수 있는 힘이다. 날아다니는 법을 터득한 자는 이 지구의 영주권자가 아니다. 그는 이따금씩 지구의 껍데기를 방문하러 올 뿐이다. 나 역시 문득 하늘로 이끌려 가는 중력에 사로잡혀 글을 쓰고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의 새로운 세계를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좌절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4

 

 

 

 

 

 

  <'공중부양'을 위해 쓴 작품 이야기 ①>

 

  잘 요약하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인용한 자신의 장편 『지는 달의 골렘』에서 한 부분을 옮겨 보겠습니다.

 

 

 

 

 

  우리는 눈을 감았다. 곧 이어서 나는 고요하지만, 점점 커져오는 기차의 소음, 바퀴가 굴러오는 소리, 도착을 알리는 경적 소리, 그 이후에는 금속이빨이 부딪히는 브레이크 소리를 들었다. 그 후에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들이 들렸다. 나는 이 경이로운 기차역에서 청력만 얻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력을 얻었다. 나는 갑자기 아버지를 보았다…… 나의 친아버지를! 그는 객차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플랫폼에는 나, 엄마, 그리고 누나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불렀다. 우리는 객차에 올라탔다. 아버지! 나는 이렇게 외치고 아버지를 껴안았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있는 힘껏 껴안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객차 내의 우리 자리로 가서 앉아 아무 말 없이 창밖에서 찐 감자를 파는 활달한 아주머니들을 마치 지상의 기적처럼 바라보았다. 그때 승무원이 들어와서 우리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우리는 당황했다.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당연히 그래야 했겠지만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우리는 집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 소리가 너무나 힘 있고 확신 있게 들려서인지 승무원도 더 이상 우리의 행선지를 자세히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놀란 듯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리 집이 어디예요, 아버지?"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얘야, 여기가 바로 우리 집이란다!"5

 

 

 

 

 

  그는 고려 사람들이 정녕 원하고, 꿈꾸며 그리워하는 곳에 가고 싶다면 "두 눈을 감고 우리의 강한 상상력의 힘으로 어느 곳으로든 이동하면 되지 않겠는가? 다만 이러한 이동을 예술적으로 치환하기만 하면 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 사람들은 강제이주로 당한 역사적 순간부터 더 이상 공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이렇게 정리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강제이주를 통해 세계가 우리 고려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아무 곳에도 없는 거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무런 인간도 아니다!"라고 파괴적인 선고를 내렸다면, 지금 우리는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 어느 곳에도 없지만 우리는 영원하다!"

 

 

 

  <'공중부양'을 위해 쓴 작품 이야기 ②>

 

  실성한 할머니가 손자(작가 알렉산드라 강)를 보며, 헤어져 살아야 했던 남편으로 착각하는 기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갑자기 따뜻한 환희로 빛나기 시작했다.

  "사샤?(할아버지와 내 이름은 똑같았다) 사샤 맞지?…… 어딜 그리 오랫동안 갔다 온 거야?"

  나는 겁이 나서 침묵을 지켰고, 할머니는 온몸을 나 있는 쪽으로 뻗치며 계속 성급히 말을 이었다. "난 잠도 안 자고 계속 당신을 기다렸어. 아직 저녁도 안 먹은 거잖아?"

  …(중략)…

  나는 문 뒤에 숨어서 그녀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이건 사람에게서 나오는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음색과 억양을 잃어버린 목소리가 완전히 용해되어 나오는 비인간적인 소리였다. 이 소리는 수십 년, 수백 년 된 소리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단지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외로움을 이 오래된 소리에 결부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지상 최초의 여인이 자신의 자궁에서 맥박이 뛰는 핏덩이를 바깥으로 밀어내며 인류의 근원을 탄생시킨 이래, 이미 그때 신생아에 대한 기쁨의 노래 사이로 그녀의 내밀한 영혼 한구석에 미래에 닥칠 상실에 대한 슬픔이 탄생하였고, 아들 또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인의 첫 번째 비명이 그 첫 번째 슬픔의 파도를 끝없는 길로 가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소리가 더 이상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게 된 이래, 그 소리는 세월의 벽을 넘어 이 지상을 날아다니며 참을 수 없는 고독함의 공허 속에 살고 있는 아내들과 어머니들의 울음으로 커져간 것이고, 수많은 도시와 나라에서 갑자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 울음소리에서 잃어버린 과거의 공명을 알아채고 전율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 단조롭게 울리는 태고의 소리가 얼굴도 없이 원대하게, 수십억의 슬픈 목소리로 연마되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새로운 목소리가 된 할머니는 자기가 날아가는 높이만큼 이끌려 올라가다 꺾여버린 것이다. 다만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뿐이며, 태고의 소리는 더욱 멀리 날아가 고요함 속으로 자취를 감출 뿐이었다. 한 사람의 슬픔은 그녀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목소리들, 새로운 상실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할미, 할미, 울지 마!"6

 

 

 

 

 

 

  <강제이주란 무엇인가?>

 

  알렉산드르 강에 대한 소개는 설명이 필요없는 충격이었습니다.

  한동안 그에 대한 생각만 했고, 그래서인지 나 또한 여기 이 세상에 살다가 가는 것이 그와 같은 입장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게 하는 사정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되겠지만, 나에게도 '공중부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중부양을 위해 이렇게 읽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1. 알렉산드르 강(김근식 옮김),「게임의 법칙-딸 카탸에게」(소설),『현대문학』 2014년 4월호, 281~282쪽. [본문으로]
  2. 알렉산드르 강(김근식 옮김),「그 어느 곳에도 없지만 영원히-성명서 : 공중부양으로서의 문학, 무사도로서의 문학(에세이)」,『현대문학』2014년 4월호, 230쪽 참조. [본문으로]
  3. 알렉산드르 강, 위의 에세이, 236~238쪽. [본문으로]
  4. 알렉산드르 강, 위의 에세이, 235~236쪽. [본문으로]
  5. 알렉산드르 강, 위의 에세이, 247쪽. [본문으로]
  6. 알덱산드르 강, 위의 소설, 276~27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