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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에세이)

by 답설재 2014. 11. 2.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자전적 에세이)

윤정임 옮김, 문학동네, 2014

 

 

 

 

아이들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언제 끝나지?'

 

 

  Ⅰ

 

 

정말로 즐거운 비명까지 질러가며 호언장담하던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다.

"페나키오니, 네가 중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다. 알겠니? 절대로!"

그 여자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70)

 

 

40여년이 훌쩍 지나가버려서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는지 두렵습니다.

교장에게 저 말을 들은 다니엘 페낙은 나중에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교사들에게!』 혹은 『교장들에게!』라는 제목을 붙여도 좋을 텐데 그걸 참고 『학교의 슬픔』이라고 했습니다.

"교사들에게!"

"교장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오늘날 패거리 짓기를 오로지 주변적인 현상으로만 치부하는 모든 이에게 말하겠다. 당신들 말이 맞다. 실업이 그렇고, 소외된 자들의 결집이 그렇고, 인종적 결집이 그렇고, 낙인의 횡포와 편부모 가정이 그렇고, 암거래 경제의 발달과 모든 종류의 밀매가 그렇다, 맞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 하나만큼은 가볍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모두가 이해하는데 혼자만 이해하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학생의 고독과 수치만은.  우리만이 그를 그 감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 양성되었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나를 구해냈던―그리고 나를 교사로 만들었던―선생님들은 그 일을 위해 양성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무능한 학교생활의 기원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았다. 원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거니와 나에게 설교를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위기에 빠진 청소년을 마주한 어른이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던졌다. 그들은 나를 놓쳤다. 하지만 매일같이 다시 몸을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거기서 건져냈다. 나와 더불어 다른 많은 아이도 건져냈다. 말 그대로 우리를 낚아올린 것이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다.(46~47)

 

 

  Ⅱ

 

 

자신은 열등생이었다는 걸 '호기롭게' 밝히고, 진정한 교사, 그런 교사의 교육만이 지적, 정신적 고통에서 인간을 구제해낼 수 있다는 걸 역설했습니다.

자신이 열등생이었던 처지에 대하여 "그들에게 나는 쉬는 시간에만 존재했고 수업 시간에는 위험인물이었으니까" 차라리 "학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패거리에 섞여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존재가 확실해지는 느낌과 함께 그 속에 용해되는 것, 정체성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 이런 게 패거리의 매력이 아닐까!"(35) 생각했던 청소년기의 경험도 다 털어놓았습니다.

"선생님은 이게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모르실 거에요!"(129)

 

열등생 출신 교사라는 걸 내세우니까, 좀 잘난 체하는 건 아닐까 싶은 반면 교사다운 교사가 되는 지름길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방!"이란 있을 수 없는 게 분명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전편에 걸쳐 그 진정성은 분명했습니다. 가령, 변두리의 아이들에 대한 르포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르포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비행 청소년의 위험을 경시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도시 폭력의 형태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두렵다. 나는 도시 폭도들의 비열한 짓거리에 두려움을 느끼며, 도시 외곽에서 살아가는 두려움 또한 알고 있다. 나는 집단주의의 위험을 느끼며 무엇보다 그런 곳에서 여자로 태어나는 어려움과 그곳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는 어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고, 세대를 거치며 이어진 실업자 집안의 아이들에게 노출된 극단적인 위험도 가늠할 수 있다(309).

 

마치 "중학생이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 우리들 중의 한 사람처럼 그렇게 고백하고 "버려질 대로 버려진 청소년을 국민적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환상의 대상으로 만드는 인간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309)고 외칩니다. 그런 채널들은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촬영한 평화 속에서, 동물들이 서로를 삼켜버리는 장면을 보여주면서도 동물 역시 음악을 배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Ⅲ

 

 

좀 잘난 체 해도 그의 말은 멋있고 아름답게 들립니다. 교육자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야 할 일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잊게 하는 데는 한 분―단 한 분!―의 선생님이면 충분하다.

어쨌든 그것이 내가 발 선생님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다(318).

 

가르치는 일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순진무구한 학생상에서 기인한다. 지혜로운 교육학이라면 열등생을 가장 정상적인 학생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선생의 역할을 온전히 정당화해주는 학생 말이다. 배우는 일 자체의 필요성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선생에게 배워야 하는 그런 열등생! 하지만 그럴 리 없다. 학교생활이 시작될 때부터 정상으로 여겨지는 학생이란 가르침에 가장 덜 저항하는 학생, 앎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학생, 교사의 능력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 학생, 이미 뭔가를 획득한 학생, 즉각적인 이해력을 가진 학생, 학생의 이해력에 접근하는 길을 찾아가는 교사의 노력을 덜어주는 학생, 배움의 필요성에 이미 자연스럽게 젖어 있는 학생, 수업 시간에 얌전히 앉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학생, 포식자들의 밀림에서 살고 싶지 않으면 이성을 훈련시켜 식욕과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요람에서부터 설득당한 학생, 대부분의 즐거움은 단조로운 반복이나 육체의 소모로 이어지는 반면 지적인 삶이란 무한히 다양하게 추구할 수 있고 극도로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는 즐거움이 원천임을 확신하는 학생, 요컨대 앎이 단 하나의 해결책이라는 걸 이해했을 학생, 즉 앎이란 인간을 무지에 붙박아놓는 노예상태에 대한 해결책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에 대한 유일한 위안임을 깨달은 학생이다(333~334).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행위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학생"에 대해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애써서 가르치지 않아도 잘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학생을 정상적인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정작 가르쳐야 할 학생은 외면합니다. 그는 가르치지 않아도 좋을 학생을 "달콤한 학생"이라고 부릅니다. 달콤한 학생! 이런 이름에 대하여 교사들은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 것입니까!

 

자네는 달콤한 학생이었네.

선생이 되고 나서 그런 훌륭한 학생들, 보기 드문 보석들을 반에서 발견하면 난 그렇게 부르곤 했다네(비밀스럽게). 난 그 달콤한 학생들을 아주 좋아했지! 나의 피로를 풀어줬거든. 자극도 되었고.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 애는 가장 정확하게, 종종 유머까지 섞어가며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지. 지성의 으뜸가는 은총인 자연스러운 신중함까지 갖추고서 말이야…… 예컨대 꼬마 노에미(아, 미안! 이제 고2이니 큰 노에미겠군!)의 국어 선생은 작년에 그애 성적표에 아주 솔직하게 '고맙다'고 썼다네. …(후략)…(339)

 

 

  Ⅳ

 

 

'자전적 에세이'여서 그럴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 온갖 이야기를 다 담고 있습니다. 가령 '욕설' '부르주아'는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상품판매(마케팅)'는 교육적으로 어떤 행위인지, '암송'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도 눈여겨볼 만한 몇 가지 사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가 그애들을 다루는 제어력, 그곳에 있다는 행복감이 분명히 드러나는 아이들 모습, 질문의 적절성, 진지하게 경청하는 태도, 열정의 조절,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스스로를 제어하는 힘, 반 전체의 에너지와 즐거움, 요컨대 미디어가 쏟아내는 난장판 교실의 끔찍한 모습과 너무나 대비되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다.

그녀는 내 질문을 다 듣더니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다른 곳에 가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160~161)

 

'내가 교사라면!' 당장 실천하거나 어디 잘 보이는 곳에 써붙여놓고 싶어 밑줄을 그은 부분은 많았습니다.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고,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을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것이며,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인데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설명(161~162)

 

인터뷰를 시키면, 카메라 앞에서 장난스러운 내용을 담아오지만, 그 영상을 말없이 두 번, 세 번, 네 번, 심지어 아홉 번까지 자꾸 틀어주면 그 웃음이 뜸해지다가 차츰 희미해지고,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가지게 되고, 진정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모두들 깨닫게 되고, 자기네들이 한 짓이 사실은 흥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꽝이었다는 걸 분명히 알고 드디어 다시 카메라를 들고 나가게 되면 진짜 삶과 관련된 것들, 좀더 진지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가족에 대해,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때로는 침묵하기도 하고, 말을 찾기도 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292~293)

 

꼬마 불량배에게는 마을놀이 역할학습 때 경찰을 시킨다는 것(294~295)

 

훌륭한 세 명의 선생님을 이야기하고 그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공통점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모른다고 하는 고백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나 못하는 아이들이나 공평하게 대하고, 단지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이해하려는 욕망을 되살려줄 줄 알았던 것뿐이며, 그분들은 자신의 노력에 대해 한 걸음 한 걸음 함께해주었고, 그 진전을 기뻐했으며, 그 느림에 조바심내지 않았고, 그의 실패를 결코 개인적인 모욕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며, 가르치는 일의 특성과 일관성과 관대함에 근거한 더없이 엄격한 까다로움을 학생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보여주었다는 것(322~323)

 

어느 아이가 "결코 해내지 못할 거라 그랬잖아요. 학교는 저한테 맞지 않아요, 선생님!" 하고 말했을 때, '얘야, 그건 백 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국가 차원의 논쟁거리란다! 학교가 너를 위해 만들어진 건지, 네가 학교를 위해 만들어진 건지에 대해 교육계가 얼마나 치고받고 싸우는지 넌 모를 거다'라고 생각했다는 것(141)

 

 

  Ⅴ

 

 

'이 사람의 생각은 멋진 거야!'

정작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한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었습니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 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감정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366~367)

 

 

<추신> 가르쳐 보고 알게 된 것

 

교사가 된 사람들은 웬만해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경험했기 때문에 가슴속에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까? 그럴수록 이런 책에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요?

어쨌든 그들은 이제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면, 예비교사들이라도 어설픈 학점따기에 매진하기보다는 이런 책 몇 권을 읽는 것이 교사가 되는 데는 더 좋은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십여 년을 가르치는 일을 해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