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우리 교육이 가는 길 - 『다른 소년』이야기

by 답설재 2014. 7. 13.

 

 

 

우리 교육이 가는 길

― 『다른 소년』이야기1

 

 

 

소년은 열여덟,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바라본다. 염색된 머리칼이 기대했던 것만큼 밝은 갈색은 아니다. 그러나 확연히 달라진 머리 모양새. 미용사가 소년의 목둘레에 감겨 있던 미용가운을 벗겨낸다. 소년은 거울 앞에 놓아둔 안경을 집어 쓴다. 이제, 다른 사람처럼 보일까. 소년은 열여덟,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바라본다. 소년이 쓴 안경은 투박한 검정 뿔테에 도수가 없는 싸구려다. 집을 나오기 석 달 전쯤 구입해둔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소년은 다음과 같은 '사건'의 주인공입니다.2

 

 

11월 하순 고3 남학생이 제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열아홉 소년은 잠을 자고 있던 엄마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8개월 동안 시체를 안방에 방치한 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학교를 다녔다. 종종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함께 놀았다. 여자 친구도 사귀었다. 수능시험도 치렀다. 결국 오랫동안 별거 중이던 아버지가 집에 찾아와 잠긴 안방 문을 열기 위해 119를 불렀다. 경찰도 함께 왔다. 방문 틈새를 메웠던 공업용 본드가 떨어져나가자 지독한 썩은 내가 순식간에 집 안을 뒤덮었다. 열아홉 소년은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 안 버릴 거지. 8개월간 죽어 있던 엄마가, 달걀이나 치즈처럼 흐물흐물 썩어 있던 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어머니를 죽였는가 하면…… 아니, 그것보다는, 서로가 사랑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들에게 죽은 엄마도 아들을 사랑했고, 엄마를 죽인 아들도 엄마를 사랑했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3

 

 

아들에게 죽은 엄마는 아들을 사랑했다. 거실 전체를 아들의 공부방으로 만들었다. 매일 새벽 한두 시까지 공부하는 아들 곁을 지켰다. 거실 책장에는 공부에 필요한 온갖 교재와 진학 자료가 꽂혀 있었다. 아들에게 죽은 엄마는 아들을 사랑했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를 하느라 아들이 제시간에 귀가하지 않자 학교로 전화를 걸어 울며불며 소동을 벌였다. 아들의 컴퓨터에서 포르노 동영상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교사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뺨을 때렸다. 아들에게 죽은 엄마는 아들을 사랑했다. 다른 여자와 살기 시작한 남편과 정식 이혼 절차에 들어가자 아들에게 이제 네가 가장으로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네가 명문대에 들어가야 나를 버린 인간들이 굽실거리며 내게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아들에게 죽은 엄마는 아들을 사랑했다. 단연코 아들의 성적이 전국 1등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약해빠진 정신력으로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다며 아들에게 자주 단식을 시켰다. 아들에게 죽은 엄마는 아들을 사랑했다.  엄마를 죽인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다. 어려서부터 엄마의 바람대로 글짓기, 암산, 영어, 웅변, 구연동화, 합기도, 스케이트, 골프를 배웠다. 각종 경시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 아들은 엄마에게 피아노와 클라리넷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엄마를 죽인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다. 내겐 너밖에 없어, 라는 엄마의 말에 저도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가 묻는 모든 질문에 거짓말일지언정 모두 답했다. 자전거 뒤에 엄마를 태우고 동네 이곳저곳을 달리기도 했다. 엄마를 죽인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의 바람대로 전국 1등이 되고 싶었다. 제가 매를 피하면 엄마가 칼을 당신 가슴에 대고 죽어버리겠다고 악을 썼기에 매를 피하지 않고 모두 맞았다. 엄마를 죽인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다. 엄마를 죽인 뒤 밤마다 엄마의 꿈을 꾸었다.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폐인처럼 지내면서도 엄마의 사진이 담긴 액자는 치우지 않았다. 엄마가 계속 저렇게 가만히 누워 있다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죽인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다.

 

  씨발년들, 그렇게 서울대가 좋으면 지들이 공부해서 가면 될 거 아냐, 왜 자식들 보고 대신 가래, 같은 학교의 어떤 아이가 말했다. 다른 아이가 이웃에 사는 특목고생 아이와 그 엄마의 재수 없는 행태를 온갖 욕설을 동원해 묘사했다. 또 다른 아이는 제가 알고 있는 강남엄마 괴담시리즈를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어떤 애가 본드를 벽 한쪽에 완전 떡칠을 해놓고 밖에서 지 엄마를 불렀대, 본드? 엄마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135~136)

 

 

 

작가가 수없이 강조했듯이 아들에게 죽은 엄마는 아들을 저렇도록 사랑했고, 엄마를 죽인 아들도 그 엄마의 사랑 못지않게 엄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거짓말 같지 않습니까? 아니, 이 일은, 이 사건은 사실은 거짓말 같지는 않습니다. 어디서든, 언제든, 자칫하면 일어날 수 있고, 누구라도 그 일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사건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일은, 엄마는 아들을,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특히 엄마는 아들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자신의 분신(分身)으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사랑했습니다. "잘못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죽이고 죽는 일까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해결했어야 합니까? 장관? 교육감? 교장? 담임교사? 죽은 엄마?

그 중에 '해결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교육은 어차피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그 경쟁을 부추긴 언론? 방송국, 신문사가 시인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당신네가 하는 일을 우리가 왜?"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 "그게 교육적 사다리다!" "이 길뿐!"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잘못되어 있습니까? 사회적 인식? 사회? 사회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합니까?

 

이번 교육감 선거 직후의 어느 신문 논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親전교조 교육감들도 '경쟁의 가치' 외면해선 안된다」. 누가 경쟁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누구를 상대로 경쟁을 시키자는 것입니까? 교육감들끼리? 선생님들끼리? 학생들끼리?

저는 반댑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에 17시간 동안 공부를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세계적으로 비웃음을 사는 이런 경쟁이라면 무조건 반댑니다! 여기서 또 나가게 되면 이제 하루에 18, 19시간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한경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 선생님들께서 학생들 곁으로 다가가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자!" 하면, 선생님들은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컬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학생의 입장이 되어 쓴 글입니다. 읽었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직 학생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략)…  노는 아이? 천만에요. 물론 화장을 하는 아이들 중에는 ‘노는 아이’도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가 거의 대부분이에요. 화장이 ‘노는’ 것 하고는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그럼 왜 화장을 하느냐고 하시겠죠? 그냥 해보는 거예요. 학생들이 도대체 화장은 왜 하는 건지 궁금하시면 어른들이 화장을 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나 어른들이나 화장을 하는 이유는 똑같을 테니까요. 뭐랄까… 자신을 나타내고 싶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고, 무언가 해야 하겠는데 얼른 그 길이 생각나지 않는 답답함 때문에 화장을 더 진하게 해보기도 해요.

아, 참! 아이라인 정도는 다들 괜찮다고 여기지만 진한 색조 화장을 하면 오히려 친구들에게조차 따돌림을 당할 수가 있어요. 그건 우리도 조심하고 있어요.

교장선생님.

선생님들 생각은 우리와 크게 다를 때가 있어요.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도 선생님들께서는 “어디까지가 화장이고, 어떤 경우가 화장이 아닌지 기준이 있어야 한다”면서 꼭 기준이나 규칙을 말씀하시죠. 학생에게 맞는 화장도 있을 것 아니에요?

화장이 나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럼 그렇다고 가르쳐주면 좋지 않을까요? 가령 “그렇게 하고 다니면 탈선의 늪에 빠지기 쉽다”면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요즘은 ‘이런 것 말고도 뭔가가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깊이 하고 있는 아이도 많아요. 단순하게 화장 얘기를 하시기보다는 그런 얘기를 더 많이 해주시면 좋겠어요. 우리는 그런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무턱대고 “고등학교, 대학을 가야 하는데 벌써부터 화장이라니!” 그러시는 건 참 답답한 말씀이에요.

 

                                   ― 「교장선생님, 저 화장하는 아이에요」(2011.9.7) 중에서

 

 

자칫하면 저렇게 굴절된 사랑에 빠지기 쉬운 저 '특별한 사랑'에서 혼자 남은 아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저거 봐, 갈매기, 아빠가 맘마 주네. 젊은 엄마는 아이와 갈매기와 제 남편을 한 컷의 사진에 담고 싶어 애가 탄다(148).

 

 

연안부두 계단참에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가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얼마든지 빠져들 수 있는 저 '사랑'에서 혼자 남은 그 아들은, 우리가 그 원인은 방치한 채 결과만은 눈여겨보는 관점에 따라, 그 기대에 따라 처리되었습니다. 사회가 그 사회로부터 격리시켰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은 그렇게 처넣으면 됩니까? 당연한 일입니까? 아, 정말…… 그 "일부 몰지각한 학생"은 우리의 자식이고, 교육은 그 아이들에게 더 급하고 더 필요합니다.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 누군가 9호실(고시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소년은 열여덟.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부른다. 갈매기처럼 끼룩대며 부른다. 그 이름은 엄마를 죽인 아들의 이름도 아닌, 지갑을 잃어버린 대학생의 이름도 아닌, 일주일 전 집을 나온 소년의 이름이다. 쿵쿵쿵, 소년은 결코 그 이름에 대답할 수 없다. 잠긴 문고리가 덜컥대며 움직인다. 난, 아니야. 난 다른 사람이야. 쿵쿵쿵, 포춘쿠키 속 새로운 세상, 이내 9호실의 문이 열릴 것이다. 소년은 열여덟, 문밖으로 나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과 다른 소년", 그러니까 "일부 몰지각한 소년들" 중의 한 명에 대한 소설은 이렇게 끝났습니다.4

 

 

 

................................................

  1. 이신조, '다른 소년'(『현대문학』 2013년 6월호, 123~149쪽). 이신조 1974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창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8년 『현대문학』 등단. 소설집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 『새로운 천사』 『감각의 시절』 장편소설 『기대어 앉은 오후』 『가상도시백서』 『29세 라운지』 『우선권은 밤에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
  2. 위의 소설 중에서(위의 책, 134쪽).
  3. 위의 소설 중에서(위의 책, 135~136쪽).
  4. 위의 소설 중에서(위의 책, 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