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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이우환이 본 서양 학생과 동양 학생들

by 답설재 2014. 7. 7.

『양의(兩義)의 예술-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이 연재되었습니다.1

 

4월호 목차에서 <마지막회>라고 표시된 것을 보고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다른 글에서 이미 썼지만, 기간을 확인하지 않아서 '느닷없이' 끝난 것 같은 축제 같았고, 그 축제 이튿날 전혀 다른 계절이 시작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지난 1, 2, 3월, 책이 올 때마다 그 글을 읽고 있었던 시간이 행복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주 행복한 줄도 모르고 지냅니다.  지나가고나서 '그것이었구나!' 하고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이 '행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재미있었고 배울 점도 많았습니다. 가령 조금만 알면 시건방지거나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많이 알고 깊이 알면 위험할 일이 전혀 없게 된다는 것도 그 중 한 가지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하지만 아는 것에 대해서도 웬만하면 입을 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대담 중에 동양 학생과 서양 학생들의 태도에 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2

 

심 : 동양 학생들과 서양 학생들의 작업에 임하는 태도나 실기에 있어서 차이를 보셨을 텐데,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 : 여기서는 가르친다는 게 개개인 상담하는 것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인데 학생이 나더러 카페에 가자고 해요. "그래 가자" 하면, 다른 학생도 따라오려고 해요. 그러면 그 학생이 "너는 나중에 와" 하고 못 오게 하거나 "한참 있다 와" 그래요. 그리고 카페에 가면 노트를 펴놓고 질문을 시작해요.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왜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네가 작품을 하면 그것을 보고 말하겠다" 해요. 그러면 "작품을 하기 전에 콘셉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라며 다시 묻는 거예요. 일본에서는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이거 난감한 거예요. 그렇게 10분이나 15분 지나면 또 다른 학생이 와요. 그러고는 먼저 학생이랑 똑같이 노트를 펴놓고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요. 며칠 후에 또 와서는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렇게 해보니까 이 점이 이상한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또 물어봐요. 이건 내가 가르치는 건지 배우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학생들이 내 화실에도 오고 싶어 했는데 거기 선생들이 말하기를, 화실을 알려주면 학생들이 쫓아와서 못살게 굴 테니까 가르쳐주면 안 된다고 해서 안 알려줬어요. 그래도 만날 쫓아와서 카페에서 커피 마시자고 권해서 얼마나 골탕 먹었는지 몰라요. 참 재미있는 경험이 되었어요. 가르쳤다기보다는 많이 배웠다고 봐요.

 

 

 

 

이우환 선생이 우리의 교육 현실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의 내용이 그동안 학생들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쳤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바로 뒤의 내용은 화가 볼탕스키 교수도 조수를 두지 않고 있다는 내용인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더구나 질문 자체가 동양 학생들과 서양 학생들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나 실기의 차이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질문과 대답이 특별히 우리 교육을 들여다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짧은 대답 속에는 우리 교육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이 여러 가지로 스며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선 이런 것들을 떠올려봤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교육에 대한 이 열거는 결코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심사숙고해서 체계화한 것도 아닙니다.

 

 

▶ 배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활동적, 적극적인 학생이 유리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학생은 실패하기가 쉽다.  ▷ 가르쳐주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실패할 가능성은 적다. 활동적, 적극적인 성향의 학생이 불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특성을 발휘할 수 없을 가능성은 있다.

 

▶ 활동적이다. 수동적, 피동적, 소극적인 학생은 피곤하다.  ▷ 정태적이다. 수동적, 피동적, 소극적인 학생은 편안하다.

 

▶ 학생이 주도적이다. 교사는 피동적일 수 있다.  ▷ 교사가 주도적이다. 학생은 피동적, 수동적이다.

 

▶ 적성, 소질 등 개성에 따른 교육이 이루어진다. 또 학생의 수준이 한계 없이 향상될 수 있다.  ▷ 전체적, 획일적 교육에 유리하다. 전체적 수준 향상에 유리하지만 개성 신장은 우연에 맡겨지기가 쉽다.    ▶ 개인간의 경쟁이 자발적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 전체적, 획일적 상황 안에서 단조롭고 직접적인 경쟁이 명료하게 이루어진다.

 

▶ 말하고 듣고, 듣고 말한다.  ▷ 듣고 대답한다.    ▶……  ▷ ……

 

 

이미 수동적, 피동적인 성격과 태도가 익숙한 우리 학생들에게는 '전체적으로는' 당연히 후자 쪽의 교육이 유리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인가 꼭! 심각하게 검토해봐야 할 것입니다.  개별적으로도 그렇다고 단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우환 선생의 저 경험담은 매우 상징적이고도 직접적인 것입니다. 섯불리 언급하기가 어렵지만 저렇게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다음은 저 대담에서 이우환 선생의 대답이 이어진 부분입니다.

 

 

이런 유럽 학생들과 달리 일본이나 한국에서 온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와서 열심히 그리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그리느냐고 물으면 그림 그린다고 말해요. "보니까 그림 그리는 것 아는데, 무슨 그림 그리느냐?"라고 다시 물으면 "글쎄, 그림 그려요. 왜 프랑스 선생님 같은 질문을 하세요?" 그럽니다. "아니, 뭘 하는지 테마나 이슈가 있을 거 아니냐?" 하고 물으면 거의가 화를 내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인가 열흘쯤 있으면 어슴푸레하게 뭘 그리는지 나오지만, 처음에는 본인도 뭘 하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 여기 학생은 콘셉트가 분명해져야 비로소 출발해요. 그런데 그게 예상한 콘셉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 막 흐트러져요. 그러면 내가 "야, 너 흐트러지고 있다"고 하면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그래요. 그런데 도중에 흐트러졌다가도 나중에 보면 살이 붙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얼추 비슷하게 나와요. 그런데 일본, 한국 학생들은 처음에는 뭐 하는지도 모르고 그리다가, 거의 끝나가면서 자신들이 뭐 하는지 알게 되는 아주 신기한 상황을 봤어요. 어느 쪽이 좋고 나쁜지는 모르겠지만, 서로가 너무 달라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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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대문학』 2014년 1~4월호, '초월적-돌과 철판의 역사', '시詩적-점과 여백의 역사', '비판적-예술가들의 역사', '양의의 작가-그리고 시詩적 전환을 위하여'로 구성되었습니다. 「좀 더 큰 어떤 다른 세상」(2014년 6월 13일 이 블로그의 글) 참조.

2. 심은록, 「양의兩義의 예술-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 : 비판적 예술가들이 역사」『현대문학』2014년 4월호(연재 제4회, 마지막회), 193~194쪽.

3. 위의 글, 194~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