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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한가한 날들의 일기 - 퇴임 이후

by 답설재 2014. 7. 3.

 

그늘에서 한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예전에 숙직을 할 때처럼 교실들을 순회하고 있었습니다. 유령처럼…….  나는 사실은 유령인데 자신이 유령인 줄도 모르고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교실의 정원 쪽으로 난 출입문이 잠겨 있지 않은 걸 발견했는데, 손을 대니까 문이 열렸고 그러자마자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키가 2미터도 넘을 것 같았고 흰색 옷을 걸치고 있었습니다. 들고 있던 책을 그 남자의 가슴팍에 들이밀며 당장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가 나가자마자 얼른 걸고리를 걸긴 했지만 빗장으로 쓸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서 조바심을 내다가 잠이 깼습니다.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었으니까 '자정을 갓 지났겠지?' 짐작하며 다시 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산기슭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학부모들과 삼삼오오 모여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저쪽으로는 아이들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신이 아이들의 편에서 그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교장이라고 잘난 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작성한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급식소에서 일할 분들의 명단을 작성한 것이었는데, 이번 달에 풀 타임으로 일할 어머니들 명단이 위에 있었고, 아래쪽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대별로, 사정에 따라 각각 한 시간씩 일할 사람, 두 시간, 세 시간씩 일할 사람들의 이름이 정연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가 서류룰 가져오기 전에, 명단을 작성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사람들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을까?'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묻지도 않고 혼자서 그 명단을 줄줄 작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는 언제나 상대방을 눈이 부신듯 바라보는 분이었는데 우리나라 탤런트 중에도 그런 사람이 딱 한 명 있습니다. 그 서류를 받고, 이번에는 내가 그 어머니를 눈이 부신 듯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이제부터라도 사람들을 눈이 부신 듯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새벽이었고, 잠이 깨어 그 어머니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분명히 매우 낯익은 분이었는데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토요일입니다. 날씨가 좋았습니다. 초등학생이라면 일기장에 <맑음>이라고 써도 좋겠지만(굳이 왜 맑음이었느냐고 꼬집을 사람도 없을 텐데) 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다가 흘러가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개임>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까짓 걸 가지고……' 당장 이 고민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모처럼 한 시간도 더 걸리는 용인에 가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점심이나 사먹고 그곳 마트에서 시장을 봐서 돌아오면 될 것입니다. 한가로운 마음을 가지니까 당장 지난밤 그 꿈들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다가 교사로 태어나서 아직도 학교 꿈이나 꾸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꿈을 꾸는 중에 비명을 지르면 아내가 깨우게 되고 왜 그러는지 물으면 예전에 젊었을 때처럼 "교실 문이 열려 있어서 어쩌고……" 하며 중얼거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많이 배워서 좋은 직장에 다니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해서 장관 후보도 되고 신문에도 나고 방송에도 나오고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들이 이런 나를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꿈은 무의식의 상태에 들어갔을 때 잠재의식이 작동한 것이라니까, 말하자면 그런 '의식도 아닌 의식'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니까 의식의 주인인 나로서는 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추장스러워할까봐 퇴임한 후에는 학교 근처에도 얼쩡거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가시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들 그럴 것입니다. 가능한 한 만나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나를 상대해주는 사람들은 마음이 좀 약한 편이어서 당장 관계를 끊지 못해 엉거주춤한 상태일 것입니다.  더러 "그렇지 않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증거로 실명을 댈 수도 있지만 그만두겠습니다.

 

"섭섭한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퇴임에 즈음해서 섭섭해하지 않겠다고, 의연히 지내겠다고 거듭거듭 다짐했지만, 인간이니까 섭섭했습니다. 더구나 안면을 전면적으로 바꾸는데는 섭섭한 마음을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제 새출발을 할 수 있거나 뭘 해서 다시 일어서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승에 가서 보자!" "내가 저승에 먼저 가서 출세하거든 보자!"고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놀라워하다가, 그러니까 '이럴 수도 있구나!' '이것이 인간이구나!' 하다가 다행히 그 마음이 이내 가라앉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예상 외로 쉽게 스러져갔습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은?  참 좋은 상태입니다. 날씨처럼!

 

이렇게 날씨가 화사한 날, 특별히 해야 할일이 생각나지 않는 날, 이렇게 할일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 아프지만 않으면 더 좋겠지만, 예를 들어 병원 신세를 질 때마다 지혈(止血)이 되지 않아서 젊은 의료진들이 사정없이 내 이 빈약한 사지를 마치 돼지나 말, 소 잡듯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 시간 가량 앉아 있으면 몸이 비틀어지는 것만 빼면 좋겠지만, 평범한 사람이니까 그런 것까지 욕심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뼈가 어떻게 됐는지 운전을 하고 앉아 있으면 좀 괴롭지만, 그것이 당장 수명(壽命)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할 일이 없다", 아내가 이 말을 들으면 "난처한 사람" "왜 할 일이 없느냐?"고 하겠지만, 그것도 내가 발설하지만 않으면 그가 알 까닭이 없습니다.

 

요약하면, 날씨는 좋고 한가롭고 이렇게 한가한 날들이 자꾸 이어지고 사람들은 무얼 하는지 자기네들끼리 잘 지내고 있고 나를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정리하고 마무리하면 더 좋을 일이 두어 가지는 될 것입니다. 또 아직은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할 사람도 두엇? 서넛? 그렇게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려면 뭐 어떻습니까…… 다 괜찮고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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