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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위화 『인생』

by 답설재 2014. 2. 21.

위화 『인생 活着』

백원담 옮김, 푸른숲 2009

 

 

 

 

 

 

 

 

푸구이 노인의 기막힌 인생 역정입니다. '뭐 이런 인생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는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야기 속의 '도련님'이 흔히 그렇듯 그는 마치 그 풍요로운 생활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다는 듯 계집질, 도박을 일삼았고, 그 못된 버릇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해서 아이를 가진 아내까지도 눈앞에 보이는 대로 구박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문 도박꾼 룽얼에게 걸려들어 단숨에 전 재산을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헐벗고 굶주리는 농부로 전락합니다. 상심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가족들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군대에 잡혀가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겨우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딸 펑샤가 열병으로 농아가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아들 유칭은 임신한 교장을 위해 수혈을 해주려고 자원했다가 온몸의 피를 모조리 빼앗겨 목숨을 잃고, 얼시라는 착한 사람에게 시집을 간 딸 펑샤도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일생을 고난 속에 살아오면서도 한결같이 그의 곁을 지켜주던 아내 자전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사위 얼시마저 공사장의 철판에 깔려 목숨을 잃었으며, 마침내 어린 외손자 쿠건도 콩을 너무 많이 먹어 죽어버립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하나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은 푸구이 노인은, 흡사 옛날 얘기하듯 자신의 그 엄청난 고난과 극한 상황 속에서의 생애를 들려 줍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싶은 것이 푸구이의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거대한 역경에 거역하지도 않지만 결코 굴복하지도 않습니다. 강물처럼 모든 걸 다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늙은 소와 함께 밭을 갈며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이렇게 썼습니다.1

 

우연히 무대 장치들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전차·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네 시간, 식사·전차·네 시간의 일·식사·잠,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똑같은 리듬에 따라, 이 길을 거의 내내 무심코 따라간다. 그러나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솟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당혹감 서린 지겨움 속에서 시작된다. …(중략)… 그 깨어남 끝에 조만간 그 결과가 오게 된다. 결과는 자살 아니면 회복이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 속에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불행보다도 강한 무엇이 있다. 육체의 판단은 정신의 그것과 다름 없는데, 육체는 소멸을 꺼리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을 얻기 전에 먼저 살아가는 습관에 빠지게 된다. 나날이 죽음을 향해 우리를 재촉하는 이 경주 속에서 육체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우선권을 지니고 있다.

 

"육체의 판단은 정신의 그것과 다름 없는데, 육체는 소멸을 꺼리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을 얻기 전에 먼저 살아가는 습관에 빠지게 된다."

 

아직은 젊었던, 그러나 가슴 시린 철학자의 저 생각을, 소설가 위화는 소설가답게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이 소설의 서문 「마음의 소리」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미국의 민요 <톰 아저씨>를 들었다. 노래 속 늙은 흑인 노예는 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언제나처럼 우호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했다. 이 노래는 내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쓰기로 했고, 그것이 바로 이 책 《인생》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라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싶은 것은, 흔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하나하나 잃어가며 살아가고, 소중한 것들도 하나하나 잃어가고, 시들해지고, 빼앗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도 '푸구이'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황제는 나를 불러 사위 삼겠다지만

길이 멀어 안 가려네.

 

푸구이가 화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부른 상징적인 노래이고, 다음은 이야기가 다 끝나고 부른 노래입니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노랫말 속에 푸구이의 인생 역정과 인생관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인생, 그의 인생관에 걸맞는 좀 그럴 듯한 단어를 찾아본다면 '운명' '숙명' '체념'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정작 푸구이 노인을 만나서 그러냐고 물으면 별 희한한 소리를 한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만약 그를 만나볼 수 있다면 그의 운명, 그의 강물 같은 가슴을 엿보면서 세상은 사실은 우리가 때로 서글퍼하며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살아볼 만한 곳이며, 우리의 이 삶 또한 다 괜찮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푸구이가 살아온 세월, 중국에는  중국혁명, 대약진, 문화대혁명 등 국가·사회적 변화가 무쌍했습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펑샤와 얼시네 집 대문에도 표어가 나붙었고, 집 안의 세숫대야에도 마오 주석, 그 노인장의 말이 새겨졌다네. 펑샤네 베갯잇에도 이런 말이 새겨져 있더군. "결코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가 하면 침대보에는 "폭풍과 격량 속에서 전진한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지. 얼시와 펑샤는 매일 마오 주석의 말씀 위에서 잠을 잤던 거야.(233~234)

 

그렇지만 그러한 변화가 그의 생활을 변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해도 그를 송두리째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 가슴에 "쥐를 잡자!"는 흉패를 써붙이고 다녀야 했던 구차함, "하나만 낳아도 삼천리가 초만원"이라는 구호 속에서 내가 못할 짓을 한 거나 아닌가 움추러들던 자신을 생각하면, 분명히 푸구이만 못한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의 식어 가는 몸을 쓰다듬어 본 적이 없이 어떻게 남을 위로하겠습니까? 따뜻한 가슴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소설을 읽고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아직도 나는 사람 하나 위로할 만한 가슴을 지니지 못한 까닭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역자는 "우리말로 옮기기까지 많은 애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만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번역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번역이구나' 싶은 느낌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부분 대화체로 엮인 소설인데도 그렇습니다. 자연스런 문장 아니면 명함도 못낼 것 같은 세상이긴 하지만 아직도 문어체와 구어체도 구분하지 못하는 역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간결한 문장들의 어미는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 룽얼이 허허 웃으며 대꾸하더군.

― 자전이 또 옷을 잡아당겨서 쳐다봤더니 다시 꿇어 앉아 있더라구.

― 그녀가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어.

― 냅다 소리를 질렀지.

― 결국 나는 자전의 뺨을 두 대나 때렸다네.

― 때리는 내가 흥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니까.

― 그것도 칠팔 개월 된 유칭을 뱃속에 품고서 말이야.

 

그래서인지 문장은 쉬우면서도 품위가 느껴졌습니다. 가령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십 년 전에 나는 한가하게 놀고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촌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어지러이 노니는 참새처럼,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햇빛 가득한 시골 마을 들녘에서 빈둥거렸다.

나는 농민들이 즐겨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했다. 그들은 대개 차통을 밭둑의 나무 밑에 놔두곤 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따라 마셨고, 더불어 내 물병까지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밭에서 일하는 남자들과 한바탕 음탕한 얘기를 하며 노닥거렸는데, 그럴 때면 내 시답잖은 얘기에 아가씨들이 남몰래 키득거리곤 했다. 그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자리를 떴다.

어느 날은 참외밭을 지키는 노인과 오후 내내 함께 앉아 노닥거렸는데, 내 평생 그렇게 많은 참외를 먹기는 처음이었다. 얼마나 먹었던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할 때는 애 밴 여자처럼 배가 불룩해 걸음조차 떼기 힘들었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뻘 되는 여자와 문간에 앉아 있노라니, 그녀는 짚신을 삼으며 '시월의 잉태'라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

 

 

 

  

 

  

 

 

 

 

 

  1. 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27, 20~2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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